상품성·리스판매 유효…“공급망 재편 지속”
매일일보 = 최동훈 기자 | 현대자동차그룹이 지난해 8월 미국에 도입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현지 시장에서 선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강화되고 있는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힘 쏟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판매실적은 IRA 도입 후 1년간 전년 동기 대비 오히려 개선됐다.
미국 자동차 시장 분석기관 콕스 오토모티브의 분석 결과 지난해 7월부터 지난 6월까지 1년간 현대차·기아(제네시스 포함)의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동기(4만9201대) 대비 13.9% 증가한 5만6025대로 집계됐다.
최근 1년간 현대차 2만9954대, 기아 2만2155대, 제네시스 3916대씩 기록했다. 현대차·기아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기반으로 개발한 아이오닉5, EV6 등 경쟁력 높은 모델을 비롯해 제네시스 전기 SUV 2종을 출시하며 고객 선택폭을 적극 확장했다.
이 결과 판매대수 뿐 아니라 판매 수익을 늘리는 성과도 거뒀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지난 5월까지 1년간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수입 규모는 32억달러(약 4조6215억원)로 2021년 9월~2022년 8월 18억달러(약 2조3964억원) 대비 1.8배 증가했다. 지난달에는 현대차 1만5392대, 기아 1만1106대씩 총 2만6498대를 판매해 월별 최고치의 판매량과 판매 비중(18.4%)을 달성했다.
양사가 현지 최종조립, 배터리 원산지 요건 등 IRA상 규제를 적용받고도 전기차 판매량을 늘릴 수 있었던 요인으로 리스(lease) 판매에 대한 예외 조항이 꼽힌다. IRA에 명시된 조립지역, 원산지 규제를 충족하지 못한 전기차 제조사들은 판매 차량에 적용되는 최고 7500달러 액수의 세제혜택을 활용할 수 없어 가격 경쟁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현지 판매물량 대부분을 한국에서 수출하는 현대차·기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다만 미국 행정부가 지난해 12월 29일(현지시간) 발표한 IRA 전기차 보조금 세액공제 추가 지침이 현대차·기아의 숨통을 트였다. 해당 지침에 따라 리스, 렌탈 형식으로 공급된 전기차에는 각종 요건에 관계없이 세제 혜택이 적용된다. 현대차·기아는 해당 추가지침을 적극 활용해 기존 한자리수에 불과했던 리스 판매 비율을 지난 상반기 기준 30% 안팎 규모로 끌어올려 경쟁력 열위를 보완했다.
스탠포드대 경제정책리서치기관(SIEPR)은 “제조사 전속 금융사들은 세액공제 자격이 없는 전기차의 세제혜택을 리스판매 방식으로 확보할 수 있다”며 “전기차 리스 급증세는 IRA의 뒷문(back door)이 큰 인기를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현대차·기아가 신차 효과, IRA 예외 조항 등에 힘입어 미국 판매실적을 늘려왔지만 안심하긴 이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현지 전기차 시장에서 가격 인하 경쟁이 심화하는 한편, 매년 강화하는 IRA 규제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지난 상반기 미국에서 영업이익률 하락을 감수하고 전기차 가격을 인하하며 경쟁사의 할인(인센티브) 전략을 유도했다. 현대차·기아도 지난해 공급 대비 높은 수요를 고려해 전개하던 ‘제값받기’ 전략을 내려놓고 인센티브 경쟁에 뛰어들었다.
콕스 오토모티브에 따르면 지난 2분기 현대차 전체 차량의 평균 인센티브 지출액은 전년동기 대비 115%나 증가한 1330달러로 분석됐다. 양사가 지난달 기록한 역대 최고 판매실적도 인센티브를 늘린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비싼 배터리 가격 때문에 전기차 판매로 유의미한 수준의 마진을 남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센티브를 늘릴수록 수익성이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 현대차·기아가 지난 2분기 국내외 시장에서 지출한 인센티브 포함 판매관리비는 전년동기 대비 5600억원 가량 늘었다.
갈수록 엄격해지는 IRA 규제도 풀어야 할 숙제다. 미국 행정부는 미국이나 미국 FTA 체결국에서 확보한 핵심광물의 적용 비율과 전기차 배터리 부품 제조 비율을 매년 점진적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핵심광물 비율과 배터리 부품 제조 비율은 각각 올해 40%, 50%에서 내년 50%, 60%로 상승할 예정이다. 2029년 이후에는 각 비율이 80% 이상, 100%에 달해야만 세액공제를 누릴 수 있다. 배터리 소재 대부분을 중국산에 의존해온 현대차·기아가 업력상 최초로 미국 생산한 전기차 제네시스 GV70 전동화 모델로 세제혜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공급망 재편의 시급함을 보여준 사례다.
송명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대차그룹이 배터리 제조사들과 협력해 배터리 소재나 생산망을 확보하는데 힘써야할 것”이라며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가격 경쟁력, 품질을 얼마나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느냐가 전기차 업황 대응의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현대차그룹은 IRA 대응력을 키우고 미국 시장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전개하고 있다. 이 일환으로 오는 2025년 1분기 주요 전기차 모델의 현지 생산을 목표로 공정 증설에 힘쓰는 중이다. 현대차·기아는 현재 미국 조지아주에 연산 30만대 규모의 전기차 전용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LG에너지솔루션, SK온과 손잡고 전기차 양산과 같은 시점에 조지아주에 배터리생산 합작 공장을 짓고 있다.
배터리 소재에 관한 중국 의존도 해소에도 힘쓰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중국 수입량이 대부분인 희토류를 사용하지 않는 전기차 구동모터를 개발 중인 한편, 사내 핵심전략소재CFT팀을 꾸려 배터리 원자재 확보 역량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적으로는 폐배터리에서 소재를 재활용하는 체제도 마련하고 있다.
현대차·기아 관계자는 “IRA 등으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관련해 전기차 현지 생산 확대 추진, 부품 현지화 등을 통해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