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최대억 기자 | 추석연휴를 며칠 앞두고 어릴 적 한 동네 살았던 히야(형아의 경상도 사투리)가 필자에게 연락 왔다.
환갑 지나 또 울컥하며 눈물을 쏟아낸다.
이 사람의 친동생은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인 1982년, 3명의 남자가 연행 후 42년째 증발 상태인 서울대학교 법대생 노진수(81학번)이다.
노진수는 1982년 5월 20일 새벽(2~3시 추정, 앞서 일부 매체에선 4월17일로 误记) 주숙했던 학교(서울대) 앞 '한림독서실'에서 '건장한 세 남자(정보기관원으로 추정)가 찾아와 함께 나갔다'는 독서실 총무의 증언 이후 실종됐다.
이 형제의 노모는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3년 전 부터 치매증상을 앓아온 노모가 소통가능할 때 마지막 웅얼거리며 반복적으로 뱉은 말은 “살인범님! 비밀보장 할 것이니, 내 아들 암매장 장소 제발 좀 가르쳐 주이소! 제발예!”이다.
두 형제의 장남 노진학도 1970년 대구 모 중학교 3학년때 유리창을 닦던 중 교정 바닥에 떨어져 숨졌고, 가족들은 안전장치 부실 등 학교 측의 관리 소홀 등 혐의로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다. 어린 노진수가 억울한 사람을 돌보겠다고 다짐하고 성장 후 법대로 진학한 이유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입학하니 노진수는 외삼촌이 1950년 사상 최대 규모의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사건인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간 이후 흔적없이 사라져 '연좌제'로 판사는 커녕 공무원도 하기 힘들다는 고심에 빠진다.
그는 법대 1학년 과대표를 맡아 5·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촌극을 기획하거나 검은 리본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며 세번 내리 휴학을 했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기록).
노진수의 실종 전후 일자별 행적에 따르면 1981년 가을, 광주 출신의 20대 후반 남자와 대구집에 방문한 노진수는 어머니 최소선 씨에게 "겁난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고, 이듬해인 1982년 5월께 고교동창 (당시 경희대 재학중) 자취방을 찾아 불안한 심경의 편지를 남겼다고 기록돼 있다.
아버지 故노금백씨는 평생 아들을 그리워하다 실종 6년뒤(1988년) 세상을 떠났고, 남편과 자식 둘을 잃은 노모도 올해 초 눈을 감았다.
지금은 딸 노순옥(69), 둘째 노진호(66)씨 남매가 남아 노진수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제보를 기다린다.
대구 남구 대명8동에서 출생한 노진수는 영선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를 졸업했으며, 고등학교(오성고) 1학년 자퇴 후 검정고시(대구 前 대영학원)를 거쳐 1981년 서울대 법대(성균관대 법대 장학생 내정)에 합격해 그해 과대표로 활동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 자료를 보면, 노진수의 실종 전후 일자별 행적에서 1981년 3~10월 당시 가택연금중인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와 접촉, 농성장에 참여했으며 경찰의 동향 관찰 및 다수 접촉과 지하 스터디그룹활동 한 진술 등이 기술돼 있다.
노진호 씨는 “윤석열 대통령님! 대구에 사는 1960년생 동년배이자 노진수의 친형인 노진호(본명: 노대영)입니다. 동생을 찾아 해매다 보니 9번째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는 군요. 제 동생은 대통령님의 같은과 후배 노진수입니다. 제발 제 동생 살해된 장소만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동생 따라 가려고 여러차례 결심도 했으나, 노모때문에 참았습니다. 이젠 노모도 떠났습니다. 제 동생에게 장례를 치르고 내년 차례상에는 꼭 동생에게 음식을 올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한다.
노진수 사건에 가담한 관계자 및 살인범은 필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족의 뜻에 따라 필자(매일일보 본사)에게 연락바란다. 앞서 유족의 뜻대로 비밀 절대 보장한다. 관련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지난 정권때 타사에서 청와대 출입하며 연맺은 한 동료기자(前 경일일보)가 퇴직후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매체에서 작년에 쓴 기고(영상 포함)를 참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