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이태민 기자 |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자본주의 사회 속 을들의 비루한 현실을 조명한다. 영화는 반지하에 사는 기택의 가족과 대저택에 사는 박사장 가족을 대비시키면서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를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박사장의 저택 지하실에 숨어 사는 문광 부부가 극에 끼어들면서 영화는 을과 을의 사투로 흘러간다. 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는 지하실 한 칸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든 짓밟으려 안간힘을 쓴다. 을의 전쟁은 결국 공멸로써 끝을 맺었다.
홈쇼핑과 유료방송업계의 송출수수료 전쟁을 보자면 영화 기생충이 떠오른다. 최근 경기 침체 여파로 재정난이 심화돼 '안녕하지 못한' 두 업계가 서로를 '갑'으로 칭하며 양보 없는 밥그릇 싸움을 펼치는 모습이 일면 닮아서다.
홈쇼핑업계는 실적 부진 상황에 판매 수익 대부분이 송출수수료로 나간다며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유료방송업계는 홈쇼핑의 영업이익에 인터넷·모바일 등을 통한 수익 지표가 반영되지 않고 있어 구체적인 매출 데이터를 제시해야 한다며 수년째 맞서고 있다. 협상 테이블에 수차례 엉덩이를 붙여본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입장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올해'도' 대부분 극적 타결을 이룰 모양새다. 가장 먼저 화해(?)의 신호탄을 쏜 건 롯데홈쇼핑과 딜라이브였다. 양사는 지난달 27일 송출 중단을 나흘 앞두고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며 송출을 이어가고 있다. NS홈쇼핑과 LG유플러스도 대가검증협의체를 발동한 직후 협상을 타결하면서 송출 중단만은 면했다. 나머지 업체들도 막판 물밑협상에 분주하다.
마지막까지 결론을 내지 못한 현대홈쇼핑과 KT스카이라이프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대가검증협의체 구성을 요청한 상태다. 덕분에 '블랙아웃'은 잠정 연기됐으니 임시방편인 셈이다. 협의체가 강제적 조정 기능이 없는 데다가 사업자 간 계약 공정성 검증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실효성 의문이 제기돼 왔음을 감안하면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다.
올해는 이렇게 넘어갔으니 내년은 과연 순탄하게 흘러갈까? 업계에서는 밥그릇 싸움이 오히려 더 치열해질 거란 전망이 우세하다. 특히 올해는 위성방송과 케이블TV를 상대로 분쟁이 진행되는 양상이지만, 내년부터는 가입자가 많은 IPTV까지 분쟁이 확전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을들의 소모전으로 인해 시청자와 중소업체가 어떤 형식으로든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위성방송은 국민의 기본적인 시청권 보장이 가능한 유일한 방송 수단으로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시청자의 기본권이 침해된다는 뜻이다. 또한 홈쇼핑 송출수수료 인하는 유료방송업계 매출 감소로 이어지면서 콘텐츠 생태계 파괴로 귀결된다. "블랙아웃이 시청자와 중소업체를 인질로 삼는 행위"라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사실상 유일하게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과기정통부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새다. 나름 해법으로 제시한 대가검증협의체도, 분쟁조정위원회도 '미봉책'이라는 지적이 적잖다. 때문에 업계는 올해 국정감사가 '효자손'이 돼주길 내심 바랐지만 가짜뉴스 논쟁에 묻히며 가려운 등을 긁지 못했다.
지난한 '을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을 방법은 두 업계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수료 산정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상생'의 길로 연결해야 한다. 상생이 없다면 공멸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이른바 '주호민 사태'를 관망한 끝에 던진 한 마디는 꽤 의미심장하다.
"을과 을의 싸움이 지닌 무의미함과 비극성은 영화 '기생충'에서 충분히 봤다."
좌우명 : 충심으로 듣고 진심으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