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화폐·내일채움공제 등 野 요구 다수 반영
정부·여당, '감액안 단독 의결'에 부담 느낀 듯
매일일보 = 이태훈 기자 | 긴 시간 '예산안 줄다리기'를 벌인 여야가 21일 예산안을 합의 처리했다. 정부·여당은 당초 건전 재정 기조를 앞세워 야당이 중시하는 예산을 대폭 또는 전액 삭감했는데, 야당이 협상을 통해 이를 상당 부분 복구시키며 사실상 예산안 정국에서 '판정승'을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고 전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합의한 내년도 657조원 규모의 예산안을 의결했다. 지난 2일이었던 법정 시한을 넘긴 지 19일 만이다. 국회 선진화법 시행 이후 '최장 지각 처리'라는 오명을 쓴 지난해 기록(12월 24일)보단 이른 시일에 통과됐지만, 여야의 입장이 얼마나 팽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야는 약속한 20일 예산안 합의를 위해 서로 한 발씩 양보했다. 여당은 상임위 심사 과정에서 야당이 전액 삭감한 원전 예산을 되살리고, 국가채무와 국채발행 규모는 정부안보다 늘리지 않기로 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건전 재정' 기조를 어느 정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당도 당초 목표(1조5000억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연구개발(R&D) 예산 6000억원을 복원했으며 지역화폐 예산과 새만금 예산도 당초 요구의 절반 수준인 각각 3000억원 증액을 이끌어 냈다. 민주당은 줄곧 증액을 요구해 온 예산 항목 대부분에서 요구를 관철시켰다.
사실상 민주당이 예산안 정국에서 판정승을 거뒀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국민의힘이 '묻지마 이재명표 예산'이라고 깎아내렸던 예산 항목 대부분에 대해 증액을 이끌어 냈다. 민주당은 소상공인의 에너지 지원금·대출 이자 보전을 위한 예산과 요양병원 간병지원 시범사업, 내일채움공제, 청년일자리 도약장려금, 천원의 아침밥 사업 관련 예산의 증액도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윤재옥 국민의힘 당 대표 권한대행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새만금 예산과 지역화폐 예산을 증액한 것에 대해 "협상에서 한편의 일방적인 승리란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양보는 불가피했다는 점을 말씀드린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협상이 지지부진할 시 민주당이 준비한 감액안을 단독 의결하겠다'는 엄포가 있었다. 실제로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협상에 진척이 나지 않을 때마다 공개 석상에서 "민주당 수정안으로 의결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여당을 압박했다.
예산 운영 주체인 정부·여당 입장에서 민주당이 주도해 통과시킨 예산안으로 한해 국정을 운영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 예산을 증액하려면 법적으로 정부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예산을 깎기만 하면 정부 동의 없이도 통과시킬 수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이 정말 예산안을 단독 처리할 수 있다는 기류가 여권에 퍼지면서 협상이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매일일보>에 "의석수라는 무기를 가진 민주당이 예산 협상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아무리 여당이라도 부족한 의석수로 예산안을 독자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익표 원내대표는 이날 정책조정회의에서 "이번 예산안에서는 정부의 잘못된 예산 편성을 바로잡고 민생 회복, 미래 준비를 위한 예산을 확보했다"며 "다양한 예산의 증액을 민주당이 주도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