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이용 기자 | 영화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는 영국 정부로부터 살인면허(License to Kill)를 부여 받은 비밀요원이다. 당국에게 합법적인 암살 권한을 얻었음을 뜻하며, 첩보 활동 중에 벌어진 살인 행위에 면책 특권이 주어진다. 주인공의 조국인 영국에서만 통용되는 면허는 아니며, 해외에서의 행위에도 정부가 직접 외교적 거래를 통해 처벌을 면하게 해 주는 묘사가 나온다.
엄청난 초법 권한을 지녔지만 정작 본드가 처단하는 인물들은 범죄자나 그 조력자 뿐이다. 본드는 엄연히 정의의 사도인데다가, 인간적 면모가 강하고 애국심도 투철해 절대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근 인공지능(AI)과 로봇을 살인에 동원하는 최근의 전쟁 트랜드다. 중동에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현재진행형이다. 해당 전쟁에선 이전 시대에선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첨단 살인 병기가 등장했다.
우크라와 러시아는 덩치가 작고 민첩한 드론을 활용해 적의 동태를 감지하거나 군인들을 살해하는 형국이다. 드론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려 혼비백산 도망가는 어린 군인의 안타까운 모습도 미디어에 종종 보인다.
이스라엘은 공습 계획 생성 AI인 ‘파이어 팩토리’를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에 활용해 논란을 빚었다. 표적의 종류, 위치, 사용 가능한 항공기, 무인기의 능력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공격 대상을 제안한다. 사실상 AI에 전쟁 외주를 맡긴 셈이다.
이스라엘군은 해당 시스템이 인간 군인의 통제 하에 다뤄지며, 빠른 의사결정으로 공습 효율을 최대화해 사상자를 적게 낸다고 강조했다. 다만 주변국들은 해당 시스템이 자동으로 표적을 제거하는 프로그램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첨단 기술에 의한 ‘살인 외주’가 현실화되면서 차라리 007은 양반이란 소리마저 나온다. 80~90년대 미국과 소련 스파이가 창궐하던 시대에도 죽는 이들은 핵심 요인으로 한정됐었다. 그런데 컴퓨터는 표적 제거라는 명분을 앞세워 수많은 젊은 군인과 민간인까지 희생시킨다. 안전한 장소에서 컴퓨터를 통해 전쟁을 통제한다면, 전쟁의 참혹함을 현장에서 느끼지 못해 살인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문제는 예전부터 제기됐다. 전쟁이 컴퓨터 게임과 다를 게 없어진 셈이다.
일상·사회생활 또한 마찬가지다. 보건의료 및 치안을 모두 첨단 기술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면 인류 전체가 도덕성을 잃을 공산이 크다. 로봇은 언제나 최선의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이 인간의 사회 통념에 부합한다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영화 ‘아이로봇’에 잘 나타났다. 영화엔 여자아이와 경찰 남성이 교통사고를 당해 함께 강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AI로봇이 물에 뛰어들었는데, 긴급 상황이라 단 한명 밖에 구할 수 없었다. 로봇은 경찰의 사회적 지위와 생존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해 아이를 버리고 남성을 구했다. 로봇의 계산에 따르면 남성이 살아남을 확률은 45%였고, 아이는 11%였다. 만약 인간이라면 아무리 적은 확률이라도 당연히 아이를 구했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인구감소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기술 확보에 주력하는 추세다. 그러나 기술은 어디까지나 ‘보조’ 개념이어야지, 인간의 자리를 꿰차서는 안된다. 인간이 AI의 판단에만 의존한다면, 인류는 결국 ‘인간 다움’을 스스로 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