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오시내 기자 | 지난 몇 년간 사우디아라비아는 스포츠에 막대한 돈을 투입했다. 네이마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세계적인 축구 스타를 자국 리그로 끌어들였다. 빈 살만 왕세자가 대표로 있는 사우디 국부펀드는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의 역사 깊은 구단 뉴캐슬을 인수했다. 2027 AFC 아시안컵, 2029 동계아시안게임, 2034 FIFA 월드컵도 유치했다.
이를 두고 각종 언론에서는 ‘스포츠워싱(sportswashing)’을 언급했다. 사우디가 인권 등의 문제를 스포츠로 가리면서 국가 이미지를 바꾸려 한다고 지적했다. 스포츠워싱은 스포츠를 이용해 부정적 평판을 가리는 것을 말한다. 과거 할리우드에서 백인 역할이 아님에도 백인을 섭외하던 용어 ‘화이트워싱(Whitewashing)’에서 파생된 말이다.
문화와 예술은 정치적 도구로 자주 사용됐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영화를 선전 도구로 활용했고, 사우디 이전 아랍에미리트 역시 축구를 이미지 변화 도구로 사용했다.
비슷한 사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 또 있다. 지난달 27일 유네스코(UNESCO)는 일본의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유산위원회 소속 21개국 전원이 사도광산의 등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사도광산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가혹한 노동을 시켰던 곳이다.
당시 거센 비난에 외교부는 “일본이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전시공간에 담는 것을 전제로 동의했다”고 밝혔으나, 곧 일본 정부가 강제성을 인정하는 내용을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7일 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매트’에는 이와 관련된 기고가 실렸다. ‘한국의 지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일본 사도광산’이라는 제목의 기고에는 일본 정부가 ‘아름다운 일본’이란 이미지 형성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또한 “외교는 국제 관계에서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지만, 그 목적은 자국민 최대 이익에 있어야 한다.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지정 이후 일본은 기뻐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분열되고 상처받았다”고 지적한다.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이라는 말이 있다. 논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매우 사소해 보이는 일이 결국엔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다는 의미다. 미끄러운 비탈길 위에서 잠시 주춤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빠른 속도로 바닥까지 떨어지고 만다는 뜻이다.
과거를 미화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노력과 이를 묵인하는 한국 정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강제징용’이 사라진 상황은 어쩌면 미끄러운 비탈길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아픈 역사가 잊히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 미끄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곧 바닥으로 치닫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