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영토 조항 지우고 국보법도 폐지하자"
北 김정은 주장 편승 비판 피하기 어려울 듯
매일일보 = 이태훈 기자 |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임종석 전 실장은 19일 "통일, 하지 맙시다"라며 "(남북이) 그냥 따로, 함께 살며 서로 존중하고 같이 행복하면 좋지 않을까"라고 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지낸 임 전 실장은 2019년 11월 정계 은퇴 선언을 하면서 "통일 운동에 매진하겠다"고 했는데, 그가 자신의 과거 입장을 거스르는 발언을 하면서 이목이 쏠린다.
임 전 실장은 이날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2024 한반도평화 공동사업 추진위원회'가 주최한 9·19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을 통해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며 당장 통일을 추구하기 보다는 '한반도 평화'로 목표를 바꾸자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그러면서 임 전 실장은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국민의 상식과 국제법적 기준, 그리고 객관적인 한반도의 현실에 맞게 모든 것을 재정비하자"며 "헌법 3조 영토 조항을 지우든지 개정하자"고 제안했다.
임 전 실장은 "남북은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고 국제 사회에서 각각의 독립국가로 주권을 행사했다"며 "이런 현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영토 조항은 그 자체로 모순일뿐더러 북한과 관련하여 각종 법률 해석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고 했다. 임 전 실장은 "국가보안법도 폐지하고 통일부도 정리하자"고도 했다.
임 전 실장은 자신이 이같이 주장하는 이유로 "통일이 전제되어있음으로 인해 적극적인 평화 조치와 화해 협력에 대한 거부감이 일고 소모적인 이념 논란이 지속된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밝혔다.
임 전 실장은 "현시점에서 통일 논의는 비현실적"이라며 "상대에 대한 부정과 적대가 지속되는 조건에서 통일 주장은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복속시키겠다는 공격적 목표다. 북한 붕괴론에 근거한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이나 윤석열 정부의 자유통일론이 그 생생한 증거"라고 말했다.
나아가 임 전 실장은 "통일이 무조건 좋다는 보장도 없다. 오래된 적대와 대립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통일이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워졌다"며 "제가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선택하자고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무엇보다 통일은 우리 세대의 선택지가 아니다. 미래 세대의 권리"라며 "충분히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와 협력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다음에 통일 논의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통일 논의를 완전히 봉인하고 30년 후에나 잘 있는지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임 전 실장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의장 출신으로 '우리 민족끼리' 반미자주통일을 추구한 민족해방(NL) 계열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점, 문재인 정부 당시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역임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이번 발언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NL은 오랫동안 국내 진보좌파 운동의 주류로 자리매김해온 파벌이다. 반미자주화를 통해 미국의 하수인 파쇼독재 정권을 타도한 뒤에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이에 따라 임 전 실장의 이날 주장이 과거 '86'(80년대 학번·60년대생 학생운동권 출신) NL 그룹이 주도해왔던 통일 담론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이번 연설문은 측근들이나 다른 86그룹 인사들과 교감없이 임 전 실장이 오랜 고민을 거쳐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이후 86그룹 내부나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번 연설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날 발언이 지난해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 통일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인 뒤 나왔다는 점에 주목해 임 전 실장의 입장 변화를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임 전 실장의 이번 발언을 두고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김정은의 통일 지우기'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임 전 실장은 이날 연설에서 "김 위원장에게도 분명히 말하지만,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 관계는 있을 수 없다"며 "평화적인, 민족적인 두 국가여야 한다"며 한국을 적대시하는 김 위원장과는 차별점을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