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EU 등 국가마다 디지털 통상 규범 상이…우리 정부 적극적 역할 필요
매일일보 = 오시내 기자 | 디지털 무역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국가 간 통상마찰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13일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에 따르면, 디지털 경제가 성장하면서 기존 거래 방식, 수단, 대상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촉발된 디지털 콘텐츠, 소프트웨어 등 무형 자산 거래 증가는 디지털 무역의 성장을 가속시키고 있다. 실제로 2022년 디지털로 제공 가능한 서비스의 세계 무역 가치는 약 9조9400억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2010년 대비 두 배 이상 수치다. 디지털 서비스는 연평균 6.6%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물리적 상품 무역과 기타 서비스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디지털 무역이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디지털 통상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각국의 데이터 보호, 지적재산권, 개인정보 보호, 사이버 보안 규범 등이 상이해 통상마찰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디지털 통상 네트워크는 디지털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인프라와 협력체계를 의미한다.
일례로 인공지능(AI)의 경우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다른 기조로 규범을 형성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이 많은 미국은 그간 개방적인 AI 정책을 펼쳐왔으나, 최근 바이든 행정부가 보호주의 정책을 연달아 내놓으며 자국 중심의 AI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빅테크 기업이 많지 않은 EU는 인공지능법 등 강한 AI 규제를 적용해 외국 기업의 침입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기조를 보인다.
주요국들의 강한 AI, 데이터 거래 규범은 높은 무역장벽으로 작용하며 통상마찰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주요국들은 데이터 전송에 대해 관세를 붙이기 시작했고 데이터 지역화 요구, 국경간 정보 이전 제한 조치, 다양한 테스트 및 인증 요구, 필터링 및 차단, 영업 비밀의 침해 또는 강제 기술 이전 등을 강화해 디지털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다. 높은 해외 의존적 경제 구조를 가진 우리나라는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가 간 통상 마찰을 줄이기 위해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범국가 차원의 노력이 이어지고는 있으나, 아직 명확한 공통 규범은 세워지지 않고 있다. 범국가 기관이 논의 중인 주요 쟁점은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부과, 국경 간 데이터 이전 자유화, 데이터 현지화와 소스코드 공개, 지식재산권 보호 문제 등이 있다. 일례로 WTO는 디지털 무역을 위한 다자간 규범을 마련하기 위해 전자상거래 협상을 주도하고 있으며, 회원국들이 디지털 무역 규제를 조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나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다자체제는 약화되는 분위기다.
공통 규범이 부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다수의 디지털 통상협정(DTA)을 추진하며 디지털 통상 네트워크를 확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디지털 통상협정은 디지털 기술과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상품, 서비스. 데이터 교환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국제 협정이다. 국가 간 디지털 무역장벽을 줄이고, 데이터 이동을 자유롭게 하며, 소비자 보호와 사이버 보안 등을 강화하는 규범 마련을 목표로 한다.
지난해 1월 정부는 한-싱가포르 디지털 동반자협정을 발효한 이후, 같은 해 6월 디지털 경제동반자협정(DEPA) 가입을 타결했다. DEPA는 싱가포르, 뉴질랜드, 칠레가 주도한 협정으로, 디지털 경제와 관련된 규범을 마련하고 데이터 이동 자유화 및 전자상거래 촉진을 목표로 한다.
또한 정부는 지난달 10일부터 12일 3일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와 디지털 통상협정 제5차 공식 협상을 진행했으며, 이달 10일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G7 산업·기술 혁신 장관회의에 참석해 디지털 통상에 대해 논의했다. G7 회원국에는 미국, 일본,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EU 등이 포함된다.
김현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협정팀장은 “G7, G2, 유네스코, OECD 등 경제협의체에서 디지털 통상 규범 공조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혁신과 관련해서도 강조되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면서 “다만, 아직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공통 규범을 도출하지는 못한 만큼 우리 정부도 적극적으로 국제 협상 테이블에 참여해 디지털 통상 합의점 마련에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에 우리 정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의장국이며, 정상회의도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내부적으로 확고한 전략 방향을 수립해 AI 등 디지털 통상에 대한 논의를 주요 안건으로 꺼내고, 디지털 통상 규범 마련에 대한 주도적 역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