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김경탁 기자]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2주 가량 남겨둔 지난 11일, 정운찬 국무총리가 서강대 특강에서 “서울대 총장 시절 노무현 정부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날 강연에서 정 총리는 ‘서울대 폐지론’과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사건’을 사례로 꼽았다고 한다.
정 총리가 참여정부를 ‘핍박의 시절’로 기억하던 날, 이명박 대통령은 2년 전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사람 중 아무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며 “이런 큰 파동은 역사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일련의 현상(?)에 대해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은 12일 자신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통해 “이 대통령이 2년 전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날, 정말 우연히도 정 총리는 그보다 조금 오래된 일을 엉뚱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처장은 “정말 우연히도 같은 날, 대통령과 총리에게 ‘의도성 기억상실증’(혹은 ‘기억조작증’)이라는 희귀 질병이 동시에 발병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라고 반박하면서 참여정부 시기 정운찬 총리와 사이에 있었던 비화를 폭로했다.
“서울대 폐지 음모? 착각 아니라 명백한 사실왜곡”
“참여정부 시절 그의 행태 떳떳하지 못한 것이었다”
김창호 전 처장은 12일 “역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냐에 따라 달라지고, 그래서 역사는 치열한 기억투쟁의 장”이라며, “이 대통령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비교적 쉽고, 이 일을 할 사람도 많을 것이기에 필자는 정 총리와의 기억투쟁을 벌이고자 한다”고 밝혔다.
‘사실’은 무엇이었나
우선 황우석 박사 논문조작사건에 대해 정 총리는 “(서울대가)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중간발표도 하고 했는데 중간발표 하지 말라고 여러 압력도 받았다”며 “최종 발표 때도 정부에서 저에 대해 이러저런 의도적 비난 등을 많이 해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처장은 “참여정부는 당시 서울대 석좌교수였던 황우석 박사를 서울대가 직접 조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사의 객관성과 신뢰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한 적은 있지만, 결코 중간발표를 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은 적은 없다”고 반박했다.
김 전 처장은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린 황우석 박사 사건의 진실을 한 점 의혹없이 밝히기 위한 문제제기를 정 총리는 ‘외압’으로 기억하는 모양”이라며, “정총리가 노무현 정부의 정당한 문제제기를 ‘외압’이나 ‘핍박’으로 왜곡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단코 진실이 아니며, 역사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서울대 폐지론’과 관련, 정 총리는 “대학입시제도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비롯해 여러 문제가 많은데 이건 모두 대학서열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정부에서) 그 정점에 있는 서울대학교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 전 처장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여정부는 ‘서울대 폐지’라는 카드로 정 총리를 핍박한 적이 없다”며, “정 총리는 2004년 교육혁신위가 내놓은 ‘국립대 공동학위 수여제’ 구상을 말하는 모양인데, 이 방안은 말 그대로 학자들로 구성된 교육혁신위가 아이디어 차원에서 만든 구상안일 뿐 실제 교육정책으로 구체화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김 전 처장에 따르면 이 구상안에 대해 당시 안병영 교육부총리는 “학벌주의는 타파해야 하지만 좋은 대학에 가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는 권장해야 한다”며 “국립대 공동학위 수여제는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음으로써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김 전 처장은 “국립대 공동학위 수여제는 일찌감치 폐기된 아이디어였고, 이 사실은 정 총리가 가장 잘 알 것”이라며, “정 총리는 마치 참여정부가 서울대를 폐지하려는 음모라도 꾸민 듯이 말하는데, 이는 가물거리는 기억에 의한 착각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왜곡”이라고 강조했다.
정 총리와 ‘정치 게임’의 내막
김 전 처장은 “정 총리는 자신을 참여정부에 의해 핍박받은 인물로 기억하지만, 추상같은 ‘춘추필법’의 역사는 오히려 정 총리를 참여정부와 각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정치게임’을 했던 인물로 기록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우선 2004년, 교육부와 교육혁신위가 마련한 2008대입제도 개선안을 놓고 참여정부와 각을 세웠던 정운찬 당시 서울대 총장의 ‘위험한 정치게임’에 대해 언급했다.
2004년 8월 26일 2008대입 개선안(시안)이 발표됐다. 1점도 안되는 점수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대학입학전형에서 수능점수를 표시하지 않고, 9등급만 제공함으로써 ‘대학입학=점수’라는 공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안이었다.
특히 대학입시에서 공교육 정상화 3원칙(이른바 ‘3불 정책’으로 불리는 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 금지)만 유지하고 구체적인 전형방식은 대학에 맡김으로써 대학이 자율적으로 공교육 정상화를 고려해 전형을 다양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내용이 그 안에 포함돼있었다.
이 안은 2개월 동안 서울, 중부, 영남, 호남 등 권역별 공청회, 고교현장, 시도교육감, 대학총장 입학처장 협의회 등 각계의 의견수렴 등을 거쳐 그해 10월 28일 ‘2008대입제도 개선안’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2005년 6월 서울대와 소위 명문 사립대들이 ‘2008학년도 대입전형계획’을 발표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들 대학의 전형계획은 사실상 ‘논술형 본고사의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성적순으로 학생들을 줄세우기가 어려워진 일부 대학들이 본고사 부활이라는 편법을 동원했고, 그 선봉에 당시 서울대 총장이었던 정 총리가 있었다.
2005년 7월 8일자 신문들의 제목은 “유감스러운 서울대와 대통령의 충돌”(경향신문), “정부-서울대 2008 입시안 전면전”(국민일보), “반박나선 서울대 ‘진압이라니…우리가 범죄자냐’”(동아일보), “정부-서울대, 왜 사사건건 싸우나”(문화일보), “노무현과 정운찬의 한판 맞짱 ‘서울대의 결투’”(조선일보 인터넷판) 등이었다.
서울대는 심층논술 강화, 3불정책 재고 등을 요구하며 참여정부의 교육정책과 대립각을 세웠고, 언론은 이를 앞 다퉈 보도하면서 참여정부를 깎아내리는데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정운찬 총장은 노 대통령과 맞짱 뜨는 인물로 묘사되면서 차세대 정치리더로 부각됐다.
김 처장은 정 총리가 자신에게 이면에서 노무현 대통령 독대를 요구했다가 대외적으로 노 대통령을 공격하는 이중행보를 보였던 사실도 폭로했다. 2005년 5월, 일면식도 없었던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국정홍보처장으로 임명받은 김 처장은 여론 주도층 상견례의 일환으로 그해 6월쯤, 인사동 남원집에서 정 총리와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정 총리는 김 처장에게 “노무현 대통령을 뵙고, 서울대를 세계적 대학으로 육성하기 위한 방안을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고, 김 처장은 “지금 제 직책상 대통령께 직접 보고드릴 시간을 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며, 서울대 학생 특강 형식의 초청강연을 마련해 자연스럽게 만남의 자리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날 정 총리는 “여러 차례 선을 대 대통령을 뵈려 했지만, 386들이 차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고, 김 처장은 “노력해보겠다”고 약속했으며, 2차로 캐피탈호텔 2층 주점으로 옮겨 또 폭탄주를 마셨다고 한다.
이날 만남 이후 김 처장은 정 총리가 경제학과 제자인 어느 기자에게 “(김 처장이) ‘자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통령을 만날 수 없다’고 허세를 부렸다”며 “웃기는 친구”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 처장은 정 총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서울대 초청강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정리된 문건을 전달하고, 대통령께 직접 건의할 기회도 물색했다. 그러나 곧 정 총리가 대학입시안을 놓고 정부를 공격하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되었고 상황이 틀어졌다.
당시 김진표 교육부총리 등이 여러 경로를 통해 언론보도에 대한 정 총리의 진심을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정 총리 측으로부터 “왜곡보도다”,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는 등의 대답이 돌아왔고, 심지어 “언론의 행태를 잘 알지 않느냐. 나(정 총리)도 당하고 있다”는 하소연이 전해지기도 했다고 김 처장은 회고했다.
‘서울대 비겁’론, 진짜 타깃은 ‘정운찬’
같은 해 7월 경,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기자들과의 저녁자리에서 “서울대 비겁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이것이 “홍보처장 막말”이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많은 질타를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 처장은 “필자는 ‘서울대’를 거론했지만, 진짜 타깃은 당시 서울대 총장이었던 ‘정 총리’였다”며, “그가 비겁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설명했다.
심층논술 강화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본고사를 부활시키려는 정운찬 총장의 편법적 인식과 함께 뒤로는 대통령에 보고할 기회를 달라면서 동시에 언론을 활용해 노무현 대통령과 대결구도를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이중플레이에 대한 지적이었다는 것이다.
김 처장은 “지금도 필자는 ‘비겁하다’라는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며, “언론에 편승해 참여정부와 대결을 즐겼던 정 총리가 이제 와서 자신을 핍박받은 인물처럼 묘사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강조했다.
김 처장은 “참여정부 시절 그의 행태는 떳떳하지 못한 것이었고, 당시를 떠올리는 지금의 기억법은 신사답지 못하다”며, “이제 참여정부는 죽은 권력일 뿐인데 왜 정 총리가 ‘핍박’이라는 거짓 기억을 통해 이미 죽은 권력을 다시 욕보이려 하는지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김 처장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의 총리직도 모자라 다시 한번 ‘참여정부 때리기’라는 왕년의 수법을 재활용하는 거라면, 그건 정 총리의 자유지만 거짓 기억으로 사실을 바꾸고,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