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금관가야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일대에서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올해 발굴조사의 성과와 조사 방향검토를 위해 11월 23일 전문가 자문회의와 주민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금관가야와 가락국의 추정 왕궁지로 주목받아 온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07년 일본인이 ‘회현리패총’을 발견해 조사한 이래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사가 진행돼 지금까지 60여 차례의 시ㆍ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대부분 도로공사 구간, 단독주택 건축용지 등에 대한 소규모 조사였지만, 이번 조사는 그동안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추정됐던 곳에서 비교적 넓은 대지(5,000㎡)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발굴조사라서 큰 의미가 있다.
금관가야는 가락국으로 불리며, 서기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남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6가야 중 하나를 말한다.
지난해 9월부터 지금까지 김해 봉황동 유적의 북동편 평탄면 일대에 대한 조사로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문화층이 확인됐고, 많은 수혈(竪穴, 구덩이)과 주거로 추정되는 생활의 흔적들도 확인됐다.
삼국 시대 문화층에서는 봉황대 구릉에서부터 지형을 따라 흐른 것으로 추정되는 물에 의한 두꺼운 퇴적층이 확인되며, 경사가 낮은 동쪽으로는 켜켜이 퇴적된 모래층이 넓게 형성돼 있었다.
발굴결과 옹(甕), 사발(碗), 시루 등 생활 용기의 토기류가 많이 확인됐고 고배(高杯, 굽다리접시), 기대(器臺, 그릇받침대), 파수부대부완(把手附臺附碗, 손잡이가 달린 굽다리바리), 차륜형토기 등과 같은 삼국 시대 고분에서 주로 보이는 유물들도 다량 수습됐다.
또한, 토우(土偶), 방추차(紡錘車, 가락바퀴) 등 토제품 뿐만 아니라 곡옥, 유리구슬 등 옥석류 장신구도 확인됐고, 골제 도자병부(骨製 刀子柄附, 뼈로 만든 손칼 손잡이) 등 골각기(骨角器)를 비롯해 상어․고래․강치 등 바다 동물의 뼈와 사슴․돼지 등 육지 동물의 뼈 등 동물유체도 다수 수습됐다.
왕궁터로 상정할 만한 유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가야 토기류와 신라계 토기류가 혼재돼 있고, 차륜형토기나 장신구류와 같이 권위 있는 계층이 쓰던 유물이 나오는 등 출토 유물의 양상과 토기의 질을 미루어 보아 이곳이 금관가야의 주요 생활 터전이었고, 금관가야가 쇠퇴한 이후에도 유력한 집단이 생활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해지역은 신라 시대에도 ‘금관경(김해경)’으로 5소경에 포함되었던 지방의 중심도시였고, 봉황동 유적이 고읍성(통일신라~고려 시대) 내부에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이 지역이 고대부터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문헌과 여타 고고 자료를 통해서도 증명된 바 있다.
현재까지는 조사가 일부만 이루어져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앞으로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이 유적이 왕궁터인지에 대한 확인과 그 성격․구조 등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앞으로도 가야 유적에 관한 학술연구를 지속해서 추진하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공개해, 가야 문화의 실체를 규명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힘써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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