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 중인 사적 제 163호, 경주 낭산 일원에서 신라 왕릉에 사용되는 다량의 석재와 건물지, 담장, 도로 등을 확인했으며 명문기와 등 300여 점의 중요 유물이 확인됐다고 문화재청이 9일 밝혔다.
조사된 유적은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이 발견된 전(傳) 황복사지(黃福寺址)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약 135m 떨어진 지점의 논 경작지이다.
이 일대는 오래 전부터 홍수로 인해 파괴된 신라왕릉과 관련 석재유물(면석, 탱석 등)들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던 곳이다. 학계에서는 신문왕릉이나 성덕왕비의 소덕왕후릉, 민애왕릉 등과 비슷한 급의 폐왕릉지로 추정되거나, <삼국유사>기록에 나온 의상대사(義湘大師)의 탑돌이와 관련있는 절인 황복사의 목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지이다.
경주시는 이러한 유적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훼손을 방지하고 폐왕릉지에 대한 앞으로의 복원‧정비를 위해 이번 발굴조사를 진행해왔다.
경주 낭산 동쪽일원 내 추정 고분지에서 확인된 석재 유물은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미완성 석재 등으로 신라 왕릉에서 주로 사용되는 유적이며 그 주변으로 8~9세기가 중심연대인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너비 16~17m) 등이 확인됐다.
이와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 신라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과 ‘정원사(鄭元寺, 鄭은 추정명문)’명 명문기와 등 유물 300여 점이 출토됐다.
* 탱석(撑石): 면석과 봉토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돌
* 면석(面石): 기단면이나 석축면을 형성하는 비교적 편평하고 넓은 돌
* 갑석(甲石): 대석(臺石) 위에 올리는 돌
* 지대석(地臺石): 지면을 단단하게 다진 후 놓는 돌
발견된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추정해본 왕릉의 지름은 약 22m로, 전(傳) 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규모이다. 조사 결과,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으로 출토된 점, 후대에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된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할 때, 당시 왕을 위하여 사전에 왕릉을 준비하던 도중 어떠한 사유인지 축조공사를 중단하였던 가릉(假陵) 석물로 추정된다.
가릉 주인공은 발굴조사 결과와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孝成王, ?~742薨)으로 추정된다. 가릉(假陵)은 왕의 죽음이 임박해 사전에 능침을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말한다.
가릉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일반적으로 신라왕경에서 확인되는 주택이나 불교 사원 건축과는 차이가 있어서 관청이나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불교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았고,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이라고 적힌 명문기와 등의 유구로 봐서 신라 왕경의 행정 조직체중 하나로 알려진 습비부(習比部)와 관련된 관청이었을 가능성도 추정해볼 수 있다.
도로유구는 현재까지 신라왕경 내 조사된 다른 도로보다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졌는데, 왕경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의 너비가 약 16~17m 정도인 점으로 볼 때, 왕경의 방리(坊里)구획에 의해 연결된 도로이거나 황복사지 사역(절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이나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대형의 미완성 석재를 이동하기 위한 특수 목적으로 가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는 앞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왕릉 축조과정과 능원제도를 비롯한 신라왕경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능원(陵園)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세자나 왕세자빈 같은 왕족의 무덤인 원(園)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번 발굴조사 성과는 9일 오후 2시 발굴현장 설명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더 자세한 내용은 (재)성림문화재연구원(김희철, ☎054-741-2831)으로 문의하면 된다.
발굴현장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100번지 황복사지 삼층석탑 남쪽 일원이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