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정부서 인정한 합법노조지만…“무노조 지역에 노조 안돼”
필스전 노조 “여성 노동자 묶어 칼로 위협 후, 고속도로에 버려”
[매일일보닷컴] 국내 많은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 생산공장을 설립, 가동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해외에 진출해 있는 몇몇 한국기업들이 해당 국가의 노동법을 무시한 채 노동탄압을 자행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이에 대한 비난과 함께 해결촉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필리핀 카바이테 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온 ‘필리핀 노동자지원센터’의 활동가들이 지난 9일 한국을 찾음으로서 (주)일경의 필리핀 현지법인인 ‘필스전(phils jeon)’의 노조탄압에 대한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이들은 방한기간 중 기자회견과 규탄집회 등을 갖고 “필리핀 정부에 의해 ‘합법적’인 노조임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단체교섭을 회피하고 부당해고를 자행하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 1990년 필리핀 카바이테 수출자유지역에 설립된 필스전은 티셔츠와 속옷을 만드는 업체로 500여명의 현지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필스전의 모회사인 (주)일경은 과거의 ‘태창’으로 2005년 내의사업부문을 이랜드에 매각한 후 2007년 1월에 사명을 변경, 의류생산 ・ 여성의류수입 ・생수(금강수) 등을 취급하고 있는 국내기업이다.필스전이 위치하고 있는 카바이테 지역은 필리핀 정부가 해외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No Union, No Strike(무노조, 무파업)’ 정책과 함께 이 지역에 입주한 기업들에게 4년간의 면세혜택을 주면서 대규모 공단지역으로 발전시킨 곳이다.
이와 관련 필리핀 노동자지원센터 조 디존 소장은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민주노총 1층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려 정부가 나서 ‘무노조 무파업’ 정책을 펴고 있는 지역인 만큼 노조결성이나 단체교섭이 어렵다. 또 2001년 아로요 정부가 들어선 뒤 수백 명의 노동운동가가 살해되는 등 필리핀 정부의 노동탄압은 극심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필리핀 카바이테 지역에 진출해 있는 업체의 약 50%는 한국기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관점에서 ‘선진국’에 해당하는 한국의 기업 또한 필리핀 정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 이 지역 노동자들의 주장이다.디존 소장은 “필리핀에 대거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에서도 파업노동자 폭행 등 노동탄압 사례가 빈번하다”면서 “한국국민들이 필리핀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고 권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에 민주노총은 노총 회의실에서 필리핀 노동자지원센터(WAC), 국제민주연대, 한국진보연대 등의 주최로 열린 ‘한국계 다국적기업 필스전의 노동탄압 고발’ 기자회견에서 연대투쟁의 뜻을 밝혔다.
필리핀 현지방문 등 필스전 노조탄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황필규 변호사는 이 자리에서 “동남아시아나 중국 등에 진출해 있는 한국의 몇몇 기업들은 노조탄압과 최소한의 임금을 주지 않기 위해 야반도주를 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면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장기간 노출돼 온 현지 노동자들이 법적절차를 밟아 한국기업에 대응한 사례는 흔치 않다. 필스전 사례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필스전은 노조를 인정하라는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노조인정 법원 판결에 ‘모르쇠’
필리핀 카바이테는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정부의 정책상 ‘무노조, 무파업’을 표방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기업인들의 입장만을 고려했을 뿐,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폭언과 폭행이었다.
이에 필스전 노동자들은 2003년 노조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단체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선거를 치러야하는 필리핀 현행법을 따라 노조등록 선거도 준비했다. 그러나 선거는 회사측의 방해로 계속해서 연기됐고, 심지어 회사측은 노조가 선거에 이길 경우 회사를 폐쇄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게 필스전 노조측 주장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노조 등록선거를 거쳐 노조가 설립됐지만 회사는 무노조 정책을 포기하지 않으며 단체협상을 거부했다. 이듬해인 2005년 3월, 필리핀 노동부는 필스전 노조를 합법노조로 선언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사측은 같은 해 8월 12일 노조위원장 엠마뉴엘 바우티스타에 이어 8월 29일부터 3일에 걸쳐 노조원 63명 사전통보없이 강제해고 시켰다. 당시 사측은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내린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노조측은 “비조합원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작업을 했다”며 반박했다.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6년 9월 1일 파업 찬반투표(총 204명 중 179명 찬성)를 거쳐 합법적으로 9월 25일부터 무기한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농성장 천막이 용역업체경비들에 의해 뜯어지고, 농성장 출입도 차단당했다. 농성이 장기화 되면서 파업참가 조합원들은 회사로 복귀하기도 했고,다시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도 했다.
이와 관련 황필규 변호사는 “모든 노동자가 해고된 2005년 8월 시점엔 이미 필스존 노조가 합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상태였다”면서 “2007년 2월, 사측이 일부 노동자들을 부추겨 어용노조를 만들어 필스전 노조의 등록이 취소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 중앙사무소에서 ‘노조취소는 위법이다. 기존 노조가 사측과 단체협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노조’라고 확정지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 회사 노사갈등이 2003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8월에는 믿기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다. 8월 5일 새벽, 필스전 공장 앞 농성장에서 자고 있던 여성 노동자 2명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괴한 10여명이 테이프로 팔다리를 묶고 칼로 위협 후 트럭에 태워 고속도로 변 웅덩이에 버린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노동자지원센터 세실리아 활동가는 “필스전 노조는 단체교섭권이 인정된 합법적인 노조기 때문에 파업도 정당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측은 사설경비 업체와 경찰들을 이용해 폭력을 가했고,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부상을 당했다”면서 “2명의 여성조합원 납치사건 후 농성장이 와해됐고, 그 과정에서 공장 앞 천막설치가 불가능해졌다. 그렇지만 필스전 노동자들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법적인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필스전 노조는 지난해 9월 직접 한국을 찾아 필스전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위반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의 한국연락사무소에 제소했다. 가이드라인은 1976년에 제정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제투자 및 다국적기업에 관한 선언의 일부분으로, ‘체약국 영토 안에 본사가 있는 다국적기업의 경우 소재지 국가의 관련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한국연락사무소는 다국적기업이 소재지 국가의 관련 법령을 지키도록 규정한 가이드라인 위반 여부를 조사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