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김영욱 기자] 12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남북당국회담 자체가 무산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 기조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향배가 주목을 받고 있다.
‘원칙과 신뢰’를 앞세운 ‘박근혜식 압박’으로 북한을 대화 문턱까지 끌어내며 호평을 받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다시 시험대에 서게 된 모양새다.
원칙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대북 스탠스를 감안하면 청와대가 수석대표 ‘격(格)’ 문제에 대해 줄곧 제기한 ‘글로벌 스탠더드’론은 오히려 향후 박근혜정부 대북정책을 읽는 키워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격’ 문제 외에도 남북관계 특수성을 빌미로 상식과 동떨어진 압박 카드를 통해 남측을 길들이려는 북한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고, 나아가 남북관계를 국제사회 기준에 맞춰 정상화시키겠다는 메시지를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 대통령의 대북 원칙론은 이번 회담이 무산됐다고 해서 흔들릴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는 게 청와대의 입장이다.
박 대통령은 그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자고 하면 원칙이 무너지고 더 비정상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민간보다 당국간 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기본 구상도 이번 회담 준비 과정을 통해 확인됐다. 박 대통령은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민간이 만나는 모습을 연출하는 식으로 적당히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갈 경우, 남북관계의 불확실성만 증폭시켜 궁극적으론 남북관계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근혜정부로선 신뢰프로세스가 작동할 수 있는 전제조건인 ‘신뢰’의 첫 단추를 꿸 대화 기회가 일단 무산된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특히 남북당국회담을 막판에 무산시킨 ‘격’ 문제는 험난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예고하는 서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 북한전문가는 “북한이 회담 하루 전날 판을 깨면서 ‘남북당국회담에 대한 우롱이고 실무접촉에 대한 왜곡으로서 엄중한 도발로 간주한다’며 흥분한 것은 한반도의 힘든 앞날을 예고하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단순히 수석대표를 누구로 할 것이냐의 감정싸움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면서 “여기엔 남북이 서로를 바라보는 복잡한 방정식이 숨겨 있다”고 말했다.
이는 ‘원칙과 신뢰’를 전면에 내세운 박 대통령과 ‘생때 자존심’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 간 물러설 수 없는 없는 정치공학의 정면충돌이기도 하다.
회담 무산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격’ 문제는 청와대에서 먼저 제기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상식, 그리고 글로벌 스텐더드가 남북관계에서라고 예외일 수 없다. 남북관계 역시 ‘상호주의 원칙’이 지배하고, 거기서 상호 존중과 신뢰의 싹을 틔어야 한반도의 평화도 보장되고, 앞날을 기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언급은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외교안보장관회의 직후 나온 것이어서 박 대통령의 직접 발언이거나, 최소한 의중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도 이러한 원칙 아래 북한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애초 차관급으로 제시했던 우리측 대표단의 격을 수정하지 않으면서 맞섰고, 결국 북한은 일방적으로 회담 보류를 통보했다.
이와 관련, 청와대 관계자는 회담 무산직후 “과거에 해왔던 것처럼 굴종이나 굴욕을 강요하는 행태는 발전된 남북관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10년 전에 잘못된 것을 계속 그렇게 가야 하나.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한다”며 “지금부터 하는 것은 서로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이 바라보는 감성과 시각에 맞춰서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혜정부는 남북간 만남에서 양측 대표의 ‘격’을 맞춰야 한다는 원칙을 수정할 계획이 없음을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