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이명박정부 시기 급격한 위상 추락을 경험했던 국가인권위원회가 정권아 바뀐 이후에도 청와대와 국회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등 한 번 추락한 위상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 위상 추락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현병철 위원장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6일 국가인권위가 민주당 전병헌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가인권위로부터 “불법사찰이 근절되도록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는 권고를 받은 청와대는 지난달 20일 대통령 이행계획을 제출했다.
대통령 이행계획이 담긴 회신 공문은 청와대가 인권위의 권고안을 접수한 지 정확히 90일 만에 인권위에 도착했다. 90일은 인권위의 권고를 받은 기관이 인권위에 이행계획을 통지해야 하는 의무 회신 기한이다.
청와대 비서실은 회신 공문에 ‘민간인 불법 사찰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음. 다시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임’이라는 주어가 없는 두 개의 문장만 적었다.
청와대가 이처럼 무성의한 회신을 한 사실이 알려지자 인권위 안팎에서는 “인권위에 대한 우롱”이라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통령 이행계획에 직원 교육이나 법령 보완 등 기본적인 내용조차 빠져 있는데다 ‘되풀이 되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사실상 불법사찰의 책임을 외면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인권위 관계자는 “청와대의 회신문은 허무개그로, 민간인 불법사찰 같은 중대 사안에 대해 90일간 고민한 결과가 두 문장이라는 것은 심각하다”고 불쾌감을 밝혔지만 정작 인권위는 한 달이 다 되도록 해당 기관이 권고를 수용했는지를 판단하는 전원위원회에 회신안을 상정하지 않고 있다.
상정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인권위는 청와대와 함께 ‘권고대상’을 받은 기관이었던 국무총리실은 두 쪽짜리 이행계획을 회신했지만 입법을 맡아야 할 국회의 경우 아예 인권위법을 어겨가며 넉 달이 지나도록 회신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국회 회신안이 접수되는 대로 세 기관의 회신안을 전원위에 상정해 권고수용 여부를 판단키로 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인권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권고에 대한 이행계획은 필요할 경우 언론 등에 공표토록 하는데 인권위가 청와대 이행계획이 부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달여 처리를 미루고 있다는 것은 ‘눈치보기’로 의심받을 만하다”고 꼬집었다.
인권위는 지난해 3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가 불거지자 직권조사를 벌여 총리실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사찰에 개입했다고 결론짓고 “불법사찰을 방지할 수 있게 정부 차원의 대책을 대통령이 확실히 밝히는 게 필요하다”며 해당 기관들에 재발방지책 마련을 권고했다. 당시 권고는 2001년 인권위 설립 이래 대통령을 상대로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