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판례와 달라…“전문의의 소견 결정적”
매일일보 = 김경렬 기자 | 신영증권이 4년 전 체결한 유언대용신탁계약이 무효로 결론 났다. 대법원에서 신탁계약을 체결한 당사자의 의사능력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유언대용신탁의 최초 판결과 다르다. 전문의의 소견서가 승패를 갈랐다. 신탁 계약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한 업계의 노력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달 말 대법원은 신탁계약무효확인의 소를 기각했다. 항소심에서 패소한 신영증권의 입장을 심리하지 않고 ‘계약 무효’로 결론 낸 셈이다. 신탁계약을 위해 등록한 서울 마포구 부동산 소유권이전등기는 말소된다.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판결문(2021나2026008 신탁계약무효확인의소)에 따르면 신영증권은 2018년 12월 24일, 2019년 3월 27일 신탁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자는 신탁계약 당시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고 있었다. 재판부는 “원고가 사건을 체결할 당시 의사능력이 없었으므로 원고의 나머지주장(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비진의의사표시)에 대해 더 나아가 판단할 필요 없이, 이 사건 신탁계약은 효력이 없다”고 설명했다.
판단 근거는 의료 전문가의 진단이었다. 치매환자의 인지‧사회기능은 MMSE(한국형 간이정신상태검사)와 GDS(전반적 퇴화척도) 검사로 정도를 측정한다. MMSE의 경우 17점 이하인 경우에는 ‘분명한 인지 기능장애’로 평가한다. 18~23점은 ‘경도 인지 기능장애’, 24점 이상은 ‘인지 손상이 없는 상태’로 본다.
계약자의 경우 계약을 체결 즈음인 2019년 1월에 MMSE 16점을 받았다. 인지 기능장애로 판단되는 수준이다. 이후 석 달 만에 23점을 받긴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알츠하이머의 경우 치료제가 없어 증상이 악화될 뿐 개선될 수 없는 점에 비추어보면 이후의 검사 결과만으로는 원고의 증상이 호전됐다거나 신탁계약 체결 당시 시행된 인지검사 결과보다 좋은 상태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신탁시장의 성장을 위해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체결할 때 보다 신중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언대용신탁 시장이 커지는 중에 증권사가 패소 소식을 전해 고객들의 불안감이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과 유사한 최초 판결(2015년 하나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소송)에서는 전문의의 소견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영증권과 달리 하나은행은 승소했다.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설령 원고의 상태가 일부 소견과 검사결과가 능력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원고에 대한 다른 진단서 및 원고의 의사를 추단할 수 있는 여러 정황들을 보면 신탁계약의 목적와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하나은행 승소를 이끌었던 김상훈 트리니티 변호사는 “유언이나 유언대용신탁을 할 필요가 있는 분들은 보통 나이가 많고 의사능력이 완전히 정상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분들이 체결한 유언이나 유언대용신탁의 유효성을 판단할 때에는 이런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일반적인 계약서의 효력을 따질 때보다는 조금 완화된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사망 전에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하고자 하는 희망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런 분들의 유언대용신탁계약을 처리하는 신탁회사들도 신탁계약 체결당시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서 등을 갖추어 둠으로써 사후에 발생할 분쟁을 미연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신탁회사는 수수료를 받고 업무를 처리하는 전문기관이기 때문에 더욱 세심하게 계약체결과정을 다루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