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불가능에 비정규직·하청 선택하는 경우도 상당수"
경기침체와 불확실성은 물론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면서 산업계의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기업들은 연구개발(R&D) 등을 통해 성장동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며 위기 극복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산업계에 고질적인 문제들이 산적해 기업들의 생존과 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다. 본지는 산업신문고라는 고정물을 통해 우리 경제의 버팀목인 산업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들에 대해 짚어보고 해결 방안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매일일보 = 신영욱 기자 | 최근 ‘하청 근로자를 직접 고용하라'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면서 산업계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법원 판결의 영향으로 관련 소송에 나서는 하청 근로자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직고용에 따른 비용 등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해고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국내 기업의 특성상 직접 고용에 따른 부담은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원청 기업과 협력업체 직원 파견 관계를 폭넓게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늘며 ‘하청 직원 직고용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달 하청업체 직원 161명을 사실상 현대제철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하청업체 소속이지만 현대제철이 작업 지시 등을 했기에 실질적인 직원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현대제철은 자회사 설립을 통해 협력업체 직원들의 직접 고용에 나선다. 지분 100%를 출자한 자회사의 명칭은 현대IEC로 강연채 현대제철 열연냉연생산담당(상무)이 대표를 겸한다.
이에 앞서 지난 2월에는 서울중앙지법이 HD현대건설기계 사내하청업체 서진이엔지에서 근무하다 해고된 27명이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지난 1월에도 포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250명이 제기한 5차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포스코의 직접 고용을 판결했다. 특히 포스코는 관련 이슈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사내하청 노동자 1556명은 총 8차례로 나눠 소송에 참여하고 있다.
이 같은 판결이 늘고 있는 것은 법원이 하청 노동자에 대한 원청기업의 지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 시스템을 활용해 작업 대상과 순서 등을 정했다는 점에서 원청의 지시가 있었다고 봤다. 법원이 연달아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며 산업계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법원이 MES를 사실상 직접 지시 수단으로 보는 상황이다 보니 이를 활용하는 기업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상당하다. 조선업계 역시 우려가 깊다. 사내하청 근로자 비중이 특히 높은 업계 특성상 하청 직원들이 소송에 나서고 패소해 직고용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경우 그에 따른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 중에는 하청 근로자에 대한 직접 고용이 강제되는 상황에 우려는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각각의 기업마다 상황, 여건 등에 차이가 있어 일편·일률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안이 아님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고 법리적인 측면만을 놓고 결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파견, 하청, 도급 등 다양한 근로 형태를 활용하면 비용과 업무 효율화 등이 가능한데 이것이 점점 어려워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의 상황과 여건이 있음에도 그것을 법원에서 강제한다는 점은 충분히 문제가 있다"며 "비용 절감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직접 고용으로 단정 지어버린다면 사용주 입장에서는 그에 따른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황 교수는 이어 "그동안 진행했던 비용 절감 부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모럴헤저드가 생기는 상황 등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능사라고 보긴 어렵고 보완이 필요하다"며 "고동노동부가 기준하는 근로기준법 등을 통해 어떤 큰 틀을 만들어주면서 그 안에서 기업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식의 진행이 필요하지 이런 판결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본다"고 조언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당장 법원의 판결을 통한 직접 고용의 강제보다는 노동 정책의 유연화나 환경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제도적 기준 마련 등이 필요할 것으로 조언했다. 탄력적인 노동 정책이 세계적인 추세가 돼 가고 있는 가운데 국내의 경우 이 같은 흐름을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미국은 해고와 채용이 모두 자유로운 유연한 노동 정책을 취하고 있다. 실제 미국 매리어트 호텔은 코로나19 사태로 고객 수요가 급감하자 대규모 직원을 일시 해고한 바 있다. 미국은 기업들의 해고가 자유로움과 동시에 실업급여 등 노동자를 위한 제도적 보호 장치도 완비해 기업들이 유연한 고용정책을 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반면 국내의 경우 해고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채용의 경우가 비교적 자유롭지만 해고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기업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 중 다수는 전체 근로자의 상당 부분을 비정규직 형태로 뽑고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현재와 같은 노동 정책 상황에서 직접 고용에 따른 비용 부담 발생은 중장기적으로도 지속된다. 하청 등의 형태를 취하면 필요에 따라 정해진 기간만큼 근로자를 고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직접 고용이 되는 순간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정도 수준의 탄력적인 노동 정책이 필요한데 아직 우리나라는 대체근로도 허용이 안 되고 해고도 경영상의 어려움에 있어서만 가능하다 "며 "기업들 입장에서는 해고가 불가능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청을 주던가 비정규직을 뽑게 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때문에 우리나라도 미국과 같은 선진국 수준을 따라가는 방향성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사법부가 잘했다 못했다 이런 것을 따지기보다는 탄력적인 노동 정책 등을 위해 정부나 국회 차원의 논의가 있으면 어떨까 한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현재 제도가 고용 시장 환경 등의 변화를 따라가고 못하는 지적도 제기된다. 법원의 판단 자체는 법을 근거로 하는 만큼 직접 고용 판결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환경 변화에 대한 부분이 고려되지 않은 법이 기준이다 보니 판결의 실효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는 "디자인 분야나 ICT 분야 등의 하청은 온라인상에서 플랫폼을 통해 아예 외국 근로자들에게도 하청이 가능하다 보니 최저임금제도나 주 52시간 제도와 같은 것들마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바뀌어 버렸다"며 "때문에 현재의 경우 법으로 근로자들의 기본적인 권익을 보호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박 교수는 "법원이라는 것은 기존의 법으로 만들어진 걸 바탕으로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며 "입법 기관에서 근로기준법과 관련해 바뀐 환경을 고려한 일종의 새로운 기준 등을 정비해서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