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당국 구두개입 나섰지만..."남발하면 효과 미미"
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미국 경기 호조와 중동 위기 고조 등의 영향으로 달러 강세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금리 인하 지연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강달러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유로화·엔화 등 주요국 통화들이 달러 앞에 무너졌고 특히 중국·인도 등 신흥국 통화 가치가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아시아 전역이 환율 비상사태에 직면한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은 구두개입까지 선언했다.
앞서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달러 지수(DXY)는 전날보다 0.04% 상승한 106.24를 기록해 5개월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달러 지수는 유로화, 엔화 등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의 상대적 가치를 의미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경제 전문가들은 달러가 더 오래 강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해 올해 연말에 달러 지수가 107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무엇보다 파월 연준 의장의 발언이 달러 강세를 거들었다. 파월 의장은 이날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행사에서 연준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목표치인 2% 달성이 예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경제 지표는 확실히 더 큰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된다면 현재의 긴축 통화정책 수준을 필요한 만큼 길게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은 인플레이션 둔화세가 진전을 보일 때까지 현 5.25∼5.50%인 기준금리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파월 의장 발언으로 이날 2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이 5%를 돌파하는 등 국채 금리 상승이 이어졌고, 이에 따라 미국과의 금리차가 의식되면서 달러를 사들이는 움직임이 더 강해지고 있다.
여기에다 이란의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 공습으로 중동 위기가 고조되면서 ‘안전 자산’인 달러 선호가 높아진 것도 달러 강세를 부추기고 있다. 한국의 경우 16일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00원을 돌파하는 등 중동 위기에 더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각국 금융당국은 시장 개입 가능성 등을 언급하며 자국 통화 방어에 나섰다. 마이너스 금리 종료 선언 이후에도 달러가 잡히지 않는 일본 금융당국은 연일 환율 관련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로이터는 “1990년 이후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엔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수입 비용이 상승해 가계 소비에 타격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와 외환당국도 고심이 커지고 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7일(한국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과 함께 외환시장 변동성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한일 재무장관이 함께 외환시장 구두개입을 한 것은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 모두 강달러에 대한 경계심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외환당국은 구두개입 강도를 점차 높여나가는 전략을 쓰고 있다. 최 부총리는 지난 15일 “적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하며 구두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바로 다음 날에는 김병환 기재부 1차관이 “시장이 우리 경제 펀더멘털과 괴리돼 과도한 변동성을 보이는 경우에는 즉각적이고 과감하게 조치하겠다”며 표현의 수위를 높였다. 그런데도 장중 1400원 선이 뚫리자 기재부와 한국은행은 국장급 담당자가 “특별한 경계감을 가지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지나친 외환시장 쏠림 현상은 우리 경제에 바람직하지 않다”며 1년7개월 만에 구두개입에 나섰다.
외환당국은 이 같은 구두개입이 지나친 강달러 심리를 억누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수요와 투기심리가 환율 상승을 더욱 부추기는 것을 차단할 수 있어서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세계적인 요인으로 환율이 오르면 여기에 편승해 투기하는 세력이 생길 수 있다”면서 “환율을 더 밀어 올려서 단기적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에 당국이 언제 개입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준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구두개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시장에서는 미국의 물가가 높고 경기가 좋은 만큼 기준금리 인하 시점이 예상보다 미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간 확전 우려에 따라 안전자산인 달러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실제 전쟁이 발발하는 등 리스크가 커지면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자극으로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가 더 늦어질 수 있다.
구두개입을 바라보는 외환시장 안팎의 분위기도 과거와 다르다. 예전만큼 효과가 크지 않고 단기간에만 영향을 준다는 시각이다.
외환당국도 구두개입을 두고 고심이다. 구두개입 뒤 정부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거나 구두개입을 남용할 경우 소위 ‘약발’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일본 외환당국은 엔화가 추락할 때마다 강력한 구두개입에 나서고 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전일 국내 외환시장에는 구두개입 뒤 미세조정으로 추정되는 달러 매도 물량이 나왔다. 한국 외환당국이 실제로 환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행보로 풀이된다.
추가적인 환율방어 수단에 대해 정부는 함구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환율방어를 위한 외환당국의 조치는 포괄범위가 넓고 종류도 다양하다”면서도 “이를 설명하면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이 갈 수 있어 공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