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권한일 기자 | 당최 수그러들지 않을 것만 같던 역대급 폭염의 기세도 처서(處暑)를 기점으로 한풀 꺾인 양상이다. 무더위가 한발 물러나고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마주하고 있자니 매년 경험하는 '처서의 기적'이 새삼 신기하고 황송할 따름이다.
예로부터 처서가 되면 '가을은 땅에서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선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의 순행.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라는 말처럼 선선한 기운이 드는 실로 반가운 시기다.
다만 아쉬운 대목은 오랜 세월 동안 동양에서 계절 변화의 척도로 삼던 24절기와 별개로 최근 사계절의 뚜렷한 매력이 점점 희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과서상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사계절이 있는 온대기후에 속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름날이 대폭 길어졌고 봄·가을 환절기가 줄었다. 길어진 여름에는 예측 불허의 국지성 호우까지 잦은 아열대성 기후로 변하는 모습이 확연하다.
기후학적으로 여름은 '일 평균기온이 섭씨 20도 이상 올라간 후 다시 떨어지지 않은 첫날부터 마지막 날'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국 6개 지점(서울·부산·인천·대구·강릉·목포)의 최근 10년간 여름은 '5월 25일~9월 28일'이다.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는 5월과 천고마비(天高馬肥)의 9월은 기후학적으론 이미 여름에 속하는 셈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912년 기상 관측 이후 여름이 줄곧 길어지고 겨울은 짧아져 왔다. 최근 30년(1991~2020년) 평균치만 놓고 보면 가장 긴 계절은 여름(118일)이고, 봄(91일), 겨울(87일), 가을(69일) 순이다.
최근 30년간 여름(5월31일~9월26일) 길이는 과거 30년(1912~1940년)보다 20일이나 길어졌다. 여름 시작일은 6월 11일에서 5월 31일로 11일 빨라졌고, 여름이 끝나는 날은 9월 17일에서 9월 26일로 9일 늦춰졌다. 반면 겨울은 22일이나 짧아졌다.
가을·겨울이 아쉬워졌고 여름이면 동남아에서나 볼 법한 습식 사우나 같은 찌는 더위와 열대성 강우인 '스콜'(squall)과 같은 '초국지성 폭우'가 일상이 됐다.
기상청은 달궈진 공기가 상승한 뒤 대기에서 포화 상태에 이르러 일순간 폭발하는 스콜과 달리, 우리나라의 국지성 호우는 대기 불안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엄연히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아열대 기후로의 변화는 평균기온 등 또 다른 수치들로 확인된다.
기상청 통계를 보면, 2022년 기준 국내 아열대 기후 지역은 전국 45곳으로, 1년 전 29곳보다 크게 늘었다. 역대급 무더위로 기록될 올해는 이보다 훨씬 증가할 전망이다.
2050년이 되면 고지대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 대부분 지역이 아열대성 기후로 변한 뒤, 이번 세기 후반(2081~2100년)엔 대한민국 전역이 아열대성 기후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벌어 먹고살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느냐는 편협한 논리에 밀려, 나날이 심각해지는 지구 온난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각박한 일상에서 그나마 맑고 공활한 하늘을 바라보며 큰 숨을 내쉴 수 있는 청명한 가을날이 빠르게 줄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씁쓸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