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따졌더니 퇴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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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따졌더니 퇴사하라고?"
  • 류세나 기자
  • 승인 2008.04.18 1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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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 여성인권 사각지대인가… "일 계속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어…"

[매일일보닷컴] 백화점, 할인점과 같은 유통계에는 유독 이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함’이 있다. 바로 근로자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식품, 의류, 화장품 등 각각의 매장을 들어설 때마다 “고객님 어서오십시오”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여성근로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유통업체들은 생활편의 서비스를 제공해 이익을 창출하기 때문에 근로자들에게 ‘손님은 왕’이라는 서비스 정신을 강조, 항상 웃으면서 고객을 대할 것을 교육시키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그녀들의 미소 이면에는 ‘잊고 싶은’ 기억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업들이 서비스 정신을 강조하는 동안 많은 여성 근로자들이 손님과 직장동료에 의한 성희롱과 폭언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5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유통업 여성비정규직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발표하면서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여성근로자들의 20%가 고객 ∙ 직장동료로부터 성희롱을 받은 경험이 있고, 특히 할인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39%가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성희롱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 기사 내용과 사진 속 특정업체와 관계없음.
지난 16일 오후,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A백화점을 찾았다. 보통 백화점 1층이 화장품, 패션잡화 등 여성 위주의 품목이 위치해 있는 까닭일지 몰라도 이 백화점 역시 입구에 들어선 순간 많은 수의 여성 근로자들이 눈에 띄었다.

지하 식품매장으로 내려가 봤다. 물건 값을 계산하는 캐셔들은 모두 여성들이 맡고 있기에 이곳의 남녀 성비는 다른 층들과 비교해도 단연 여성의 수가 많았다.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라 대다수 유통업체들의 점원은 여성들로 구성돼있다. 때문에 유통업체는 여성의 사회진출 정도를 몸소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양한 부류의, 또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볼 꼴 못 볼 꼴’을 겪게 되기도 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의뢰해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유통업 여성비정규직의 인권상황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성근로자 5명 중 1명이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희롱을 받은 경험이 있는 남성의 비율이 4%에 불과한 것에 비교하면 20%란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다.
실제로 취재과정에서 만난 유통업체에서 근무하는 대다수의 여성들은 개인별로 강도차이는 있었지만 성희롱, 폭언으로 인한 성적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A백화점에서 1년째 근무를 하고 있다고 밝힌 문희란(24∙ 가명)씨는 함께 일하는 매장의 매니저의 시선이 달갑지 않다고 기자에게 털어놨다. 문씨는 “일을 하다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보면 특정 신체부위에 시선이 가 있는 매니저가 눈에 띈다”면서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여직원들을 항상 위아래로 훑어보곤 해 여직원들 사이에서 ‘기피대상 1호’로 꼽힌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씨는 매니저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상부에 건의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지 못했다. “시선이 꺼림칙하고 기분 나쁘지만 일하는데 지장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윗선에 얘기 하지 않았다. 건의할 만한 일도 아닌 것 같고, 얘기를 잘못 꺼냈다간 오히려 나만 불리해질 것 같아서”라는 게 문씨의 이유였다.

같은 백화점 지하매장에서 물품을 진열하는 일을 하고 있는 신미혜(28∙ 가명)씨도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선반에 물품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상자를 자주 옮겨야하기 때문에 창고를 들어가는 일이 잦다. 그 때 몇몇 남자직원들은 지나가는 길이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과도하게 밀착시킨다”며 “또 물건을 진열하고 있을 때 장난을 친다며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면 ‘내가 노리개인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신씨는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돼 남몰래 눈물을 훔쳤던 적도 있다고 전했다. 어딘가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노동조합도 설립돼 있지 않은 ‘비정규직 운명’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삭이고 말았다고 밝혔다.

“실효성 있는 법안이 나오길…”

이에 대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연구위원은 “유통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의 대부분이 회사에서 마찰이 생길 경우 혼자서 무마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서 “고객은 물론 동료간에 갈등이 발생할 경우 재계약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인권위에서 발표한 자료 중 할인점에서 근무하는 여성 근로자의 39%가 ‘비정규직은 재계약을 위해 성희롱도 참아야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회사측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이 같은 내용의 항목에 62%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와 관련 노동부는 오는 6월 22일 개정되는 ‘남녀 고용평등 및 직장 가정생활의 양립 지원법률’에 따라 직장 내 성희롱은 물론 제3자에 의한 성희롱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노동부 최기동 여성고용과장은 “여성근로자가 성희롱으로 인한 고충을 털어놓았다고 해서 해고, 전환배치, 승진 등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법률을 개정했다”면서 “이를 지키는 않는 사업장에 대해서는 5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 과장은 이어 “매년 전 사업장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며 “이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 점검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500만원의 과태료는 대기업 입장에서 ‘적은’ 액수이기 때문에 기업입장에선 과태료를 지불하고서라도 ‘말 많은’ 직원을 해고하고, ‘말 잘 듣는’ 직원을 채용하게 될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다. 때문에 최 과장의 이 같은 계획이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발휘하게 될 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민정 여성과장은 “여성 근로자들이 느끼는 성희롱은 신체적인 접촉뿐 아니라 언어적, 시각적인데서 오는 것도 크다”면서 “제대로 홍보되지 않는 법안을 만들기보다는 매장 내에 ‘여성근로자에 대한 성희롱을 근절하자’는 내용의 포스터 한 장을 붙이는 게 더 효과가 클 것”이라며 관계당국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했다. 

한편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시한 이번 면접∙ 설문조사는 현대백화점, 롯데백화점, 이랜드홈에버, 로레알코리아, 샤넬 등 22개 업체에서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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