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고 정몽헌 회장 명예회복 되어야
대법, 박지원씨 뇌물 ‘무죄취지’ 파기환송
“김영완 진술서 증거능력 없고 이익치 진술 신빙성 의심”
고 정몽헌 회장의 명예회복에 청신호가 켜졌다.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기소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취지로 파기환송 판결이 났기 때문.
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하면서도 명예회복의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현대그룹은 “정치적으로도 워낙 민감한 사안인 만큼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관여할 입장이 못된다”며 공식적 반응을 피했다. 그러나 비자금 사건 수사가 지난해 8월 고 정몽헌 회장의 자살과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회한’에 젖는 모습이었다.
박 전 장관이 무혐의인 것으로 확정된다면 정 회장은 그야말로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남편의 죽음과 관련 “정 회장은 결코 나약하지 않았으며 처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니다”라며 “혼자 모든 것을 안고 가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세월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21일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취임 1주년을 맞았다.
현 회장의 남편인 고(故)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작년 8월4일 세상을 떠난 이후 `경영권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현대그룹은 현 회장 체제의 1년간 경영권 분쟁의 후폭풍을 잘 이겨내고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그룹 한 관계자는 “훗날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정 회장에 대해 세간에 오해됐던 부분들이 뒤늦게나마 풀리는 단초가 됐으면 한다”며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시시비비가 명확히 가려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대법원은 지난해 대북송금 특검과정에서 밝혀진 박 전 장관의 직권남용, 외국환거래법 위반, SK그룹에서 7천만원을 받은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확정, 일정부분 사법처리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대법원의 선고는 지난해 대북송금 특검 이후 현대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구속기소돼 쇠락의 길을 걸었던 박 전 장관에게 뇌물수수 정치인이라는 치욕스런 불명예를 떨쳐버릴 면죄부를 준 것이다.
또한 불법 대북송금 과정에 연루돼 사법처리를 받았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이 이미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박 전 장관에게도 사법적 명예회복의 길까지 마련해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국민의 정부 시절 박 전 장관과 함께 양대 실세로 통했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현대 비자금 200억원을 수수한 혐의에 대해 지난달 8일 대법원이 징역 5년, 몰수 국민주택채권 500매(50억) 및 추징금 150억원을 확정한 것과 큰 대조를 보이는 대목이다.
박 전 장관 재판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쟁점은 대법원이 파기환송의 주된 사유로 삼았던 김영완씨 진술서의 증거능력과 이익치씨 진술의 신빙성 여부이다.
“박씨에 유리한 점 감안하지 않았다”…검찰 ‘당혹’
與‘박지원 재판’ 다행 - 野 “신중한 반응 보여”
해외도피중인 상태에서 변호인을 통해 검찰에 진술서를 제출한 김씨는 박 전 장관이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에게 뇌물을 요구했고 박 전 장관에게서 150억원 어치 양도성 예금증서(CD)를 건네받아 돈세탁한 뒤 수시로 박 전 장관에게 이를 지급했다고 밝혔었다.
대법원은 “김씨 진술서는 작성경위와 방법이 비정상적이고 이례적이며 피고인에 대한 반대신문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어 `신용성의 정황적 보장’이 결여돼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현대에서 마련한 CD 150억원을 박 전 장관에게 직접 건넸다는 이익치씨의 주장은 진술의 일관성과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대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대법원은 “이씨의 진술이 경험칙상 사리에 맞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있고 주차장소나 전달시간 등 신빙성과 관련, 매우 중요한 사항에 대해 진술의 일관성이 없는 등 피고인이 이씨에게서 CD를 받았다는 점을 의심케 하는 사정이 있어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또 유력한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정몽헌 회장은 이미 사망한 상태인데다 진술 역시 150억원의 CD를 마련했고 이를 박 전 장관에게 전해주라는 말을 한 사실만 인정될 뿐, CD가 박 전 장관에게 넘겨졌음을 입증할 수준은 아니라고 봤다.
대법원이 사실상 무죄 취지의 판단을 내림에 따라 검찰은 파기환송심에서 박 전 장관의 혐의를 다시 입증할 책임을 떠안게 됐다.
검찰은 법원의 판결에 대해 “박 전 장관이 150억원을 받은 혐의가 있다는 데 확신을 갖고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지만 내심 당혹해 하는 기색도 역력하다.
검찰은 또 “파기환송된 고법에서 이익치씨 진술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도록 보완해 법원의 심증을 확실히 하도록 하겠다”며 일단은 이씨 진술을 보강할 증거를 수집·확보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씨의 진술은 이미 법원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을 받은 만큼 혐의를 입증할 열쇠를 쥐고 있는 김영완씨의 신병확보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1,2심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아 유죄의 유력한 증거가 됐던 김씨 진술조서는 대법원의 정반대 판단으로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됐기 때문에 검찰 입장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법원이 납득할 만한 추가 진술을 김씨를 통해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사실상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소동기 변호사는 “대법원이 사건의 실체를 명확히 꿰뚫어봐서 박 전 장관의 억울함을 해소했다”며 “대법원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소 변호사는 “대법원은 원심이 유죄의 증거로 채택한 김영완씨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고 이익치씨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향후 파기환송심에서 이같은 대법원의 판단이 뒤집히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이익치씨의 진술서가 이미 23차례나 작성돼 있어 검찰이 이씨 진술의 신빙성을 보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며 “문제는 김영완씨인데 김씨 역시 입국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김씨가 현대 비자금 200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 5년이 확정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사건에서 공범으로 지목돼 있는데다 이번 판결대로라면 김씨가 양도성 예금증서(CD)를 횡령했을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자진귀국 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소 변호사는 대법원의 선고 직후 박 전 장관의 보석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히면서 “박 전 장관이 처한 상황을 고려, 대법원이 적절히 판단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대법원이 박지원(朴智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현대 비자금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로 항소심 결과를 파기 환송한 데 대해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 의원들은 박 전 실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대선자금 사건 등으로 재판에 계류중인 여야 정치인들에 대한 관용과 화해 조치를 주장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대법원이 박지원(朴智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현대비자금 150억원 수수사건에 대해 무죄취지로 파기 환송한 것과 관련, “정치권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법원의 결정에 대해 정치권이 이런저런 논평을 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게 한나라당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