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고 싶어도 학업소홀로 ‘오로지 운동밖에’
인권위 “엘리트체육→인권체육으로 전환해야”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전국 중∙고등학교 운동선수 10명 중 8명이 지도자나 선배 등으로부터 폭행당한 적이 있고, 10명 중 6명은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충격적인 조사결과가 나왔다.
특히 선배 등으로부터 성관계를 요구 당하거나 실제로 성관계를 맺은 학생의 수도 적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동안 공공한 비밀로 치부돼왔던 청소년 운동선수에 대한 인권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게다가 이들 학생운동선수들은 학습권마저 박탈 받고 있어 사실상 운동 외의 모든 길이 막혀 있는 상황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9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이화여대 산악협력단과 함께 5월부터 6개월간 전국 중∙고교 남녀 학생선수 1,13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운동선수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한국 청소년 운동선수의 인권 현주소를 진단했다.
사례1. 감독님이 별 이유 없이 뺨을 때려요. 함께 합숙하던 초등학교 1학년 선수가 감독님이 때리는 걸 피하다가 고막이 터져 수술을 했어요. 그러면 안 때려야 하잖아요. 작심삼일이에요. 삼일 뒤에 또 때리는 걸 봤어요. (남중3∙농구)
사례2. 선배가 아무 때나 옷을 벗으라고 하고 몸 여기저기를 만져요. 여기 중요부위 같은데요. 선배 말고도 감독님도 가끔 그러세요. 제가 아는 남자선배도 그런 일을 당한 적 있대요. (남중2∙농구)
사례3. 중학교 때 수학 과외를 받았는데, 선생님에게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더하기 빼기부터 하고 싶다’고 솔직히 얘기했어요. 근데 ‘네 나이에 무슨 더하기냐’면서 장난인 줄 알고 분수부터 하자는 거예요. 저 분수모르거든요. 더하기 빼기 조금 가르쳐주시다가 그만 두시더라고요. (여고2∙배드민턴&골프)
‘때린데 또 때리고’…폭행의 일상화
인권위 발표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중 78.8%가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중 25%의 학생들은 일주일에 1~2번 이상, 5%의 학생들은 ‘매일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폭력 피해에 대한 개인적 대처 방법은 41.5%가 ‘참거나 모르는 척 한다’고 답했으며 33.2%는 ‘얼굴만 찡그리는 등 소심하게 불만을 표시한다’고 말했다.
특히 훈련과 관련 없는 폭력의 경우 선배에 의한 폭력이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앞으로 운동부 폭력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선후배간의 위계질서와 군기잡기 등 비공식적인 형태의 폭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시사해주는 부분이다.
조사에 참가한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이명선 위원은 “폭력의 행위자는 훈련시에는 코치, 훈련 외에는 선배 순이었지만 선배들에 의한 폭력은 성희롱과 같은 성폭력 형태와 결합해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지도자-학생 간의 폭력은 학생선수들 간의 폭력과 구타문화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이어 “체육계에는 훈련을 위해서는 체벌이 필요하다는 통념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 간에 이뤄지는 폭력은 시너지 효과는커녕 심리∙정서적 피해만을 안겨주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폭력 이후 ‘연습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학생은 20.1%에 불과한 반면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고 응답한 학생은 전체 응답자의 56.4%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더듬고, 만지고’…성폭력 수준도 심각
이번 조사대상자 중 63.8%는 성폭력 피해 경험을 호소했다. 성관계를 요구당한 사례는 17건이었으며 실제로 11명의 학생은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형별로는 ▲언어적 성희롱 58.3% ▲강제추행 25.4% ▲시각적 성희롱 16.8% ▲강제적 성관계 요구1.5% ▲강간 1.0% 순이었다.
‘몸이나 외모를 갖고 농담한다’(58.5.9%), ‘신체를 허락 없이 만진 적이 있다’(19.6%), ‘뺨에 뽀뽀해달라고 강요하거나 강제로 키스한다’(11.2%), ‘고의로 바지를 내리거나 몸을 보여준다’(9.6%) 등이 대표적 피해 사례로 나타났다.
심층면접에 참여한 한 핸드볼선수(중2∙여)는 “훈련할 때 수비방법을 알려주며 감독이 옆구리, 가슴 등을 만진다”며 “한 두 번은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같은 행동이 훈련 때마다 반복돼 정말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인권위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장소로 가장 많이 지적된 곳은 학생선수들이 생활하는 합숙장소였다”면서 “이들의 생활공간이 성폭력의 주요한 공간이 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합숙소나 기숙사 제도에 대한 근본인 개선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성폭력을 당하고 있는 학생들의 대처 능력은 미비한 것으로 조사됐다. ‘불만을 말하면 선수생활에 불리할 것 같아서’(33.2%),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서’(29.7%), ‘말해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29.5%)라고 응답한 조사 결과는 실제 피해현장에 있는 학생선수들이 적절한 대응방식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설사 문제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하기 빼기부터 배우고 싶어’…수업 결손 심각
청소년 운동선수들에 대한 학습권 침해도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학생 선수들의 경우 정규 수업 참여 시간은 시합이 있을 때 1주일 평균 2시간, 시합이 없을 때는 4.4시간 정도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82%의 학생들이 수업 결손에 대한 보충 수업을 받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이와 관련 인권위 문경란 상임위원은 “학생 운동선수들의 학습권 침해는 이들이 미래의 계획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운동 이외의 대안을 찾기 어렵게 하거나 다양한 문제해결 능력, 사회적응능력을 제한시킬 수 있다”며 “많은 학생 선수들이 오전수업정도는 들어가지만, 그마저도 전지훈련, 대회를 참가하고 오면 진도를 못 따라가 수업시간 잠을 잔다고 응답한 학생들이 상당수였다”고 말했다.
문 위원은 이어 “우리나라 청소년 선수학생들의 인권문제는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의 사고방식을 가진 우리나라의 체육현실을 대변해주고 있다”며 “대회 성적위주의 정책에서 인권위주 정책으로 전환하고 최저 학업기준, 개인 보충학습 제도 등을 시급히 도입해야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