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만에 2조 증가...정부 압박에 풍선효과
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국내 5대 은행이 기업들에게 내준 대출이 올해 들어서만 55조원 넘게 불어나면서 820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가계대출 증가 폭이 30조원대 초반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가파른 확장세다.
금융당국이 가계부채를 잡겠다며 총력전을 펼치는 사이 기업대출이 그 이상으로 몸집을 불린 셈이다. 설상가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사태 이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수년째 계속돼 온 금융지원이 끝나면서 연체율 상승으로 인한 위기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개 은행이 보유한 기업대출 잔액은 총 822조8715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7.2%(55조5576억원) 늘었다. 이같은 기업대출 확대 속도는 기업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조사 대상 은행들에서나 가계대출 잔액은 725조3642억원으로 같은 기간 대비 4.8%(32조9548억원) 증가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시선은 가계부채로 쏠려 있다. 가계 빚을 잡겠다며 잇따라 관련 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기업대출에 대해서는 아직 별다른 메시지를 내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이 이번 달부터 가계부채를 옥죄는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2단계로 올리면서 개인 대출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 DSR은 대출받는 사람의 전체 금융부채 원리금 부담이 소득과 비교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하기 위한 지표다. 차주가 1년에 갚아야 할 원리금 상환액을 연 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현재 은행권에선 차주의 DSR이 40%를 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금융당국이 스트레스 DSR로 체계를 바꾼 건 올해 2월부터다. 이어 9월부터 시행된 2단계 스트레스 DSR에서는 가산되는 스트레스 금리 폭이 더 커졌고, 그만큼 한도도 더 줄었다.
문제는 이런 와중 기업대출의 질이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출 규모가 계속 커지는 동시에 연체율이 꿈틀대면서 우려가 가중되는 상황이다. 고금리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대출 이자가 쌓이고, 이로 인해 빚을 갚는데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의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말 기준 5대 은행의 기업대출 연체율은 평균 0.36%로 1년 전보다 0.05%p 올랐다. 같은 기간 가계대출 연체율도 0.27%로 0.02%p 상승하긴 했지만, 연체율 자체 수치는 물론 상승 폭도 모두 기업대출이 훨씬 높았다.
특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등을 대상으로 한 코로나19 금융지원이 사라진 직후 이처럼 연체가 쌓이고 있는 현실이다. 금융지원이 아니었다면 연체로 이어졌을 대출 중 상당수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억눌려 오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실제 국내 은행들에서 나간 자영업자대출은 최근 석 달 동안에만 2조원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압박으로 주택담보대출을 조일 수밖에 없게 된 은행들이 기업을 상대로 한 영업으로 눈을 돌리면서, 개인사업자에 대한 문턱도 낮춘 영향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은행권의 개인사업자대출은 총 453조9000억원으로 지난 상반기 말보다 2조원 증가했다. 이는 은행들이 가계 대신 기업을 대상으로 한 대출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개인사업자에 대한 허들도 낮춘 결과로 풀이된다.
은행들은 개인사업자대출을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대출 한도를 늘리거나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는 등 동네 사장님 모객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직후인 2020년 4월부터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상대로 실시돼 온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는 4년 넘게 지속되다가 지난해 9월 종료됐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19 금융지원에 따른 만기연장·상환유예 지원 금액은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76조2000억원에 달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가 가계에 집중돼 있지만, 기업 여신도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며 "가계대출을 옥죌수록 은행 입장에서는 기업 여신 영업을 대안으로 삼을 수 있는 만큼 풍선효과에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