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박수진 기자] 금융당국이 취약차주를 위해 은행 대출 원금의 최대 45%를 감면해주는 ‘채무조정제도’를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여론 반발에 부딪혀 재검토에 들어갔다. 빚지고 갚지 않으면 된다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물론, 열심히 채무 탕감에 나선 차주들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일자 “정해진 바 없다”며 한 발 물러난 모습을 보였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지난 5일 이런 내용의 ‘은행권 취약차주 부담 완화 방안’을 각 은행에 주문했다.
해당 방안은 취약차주가 빚을 갚지 못해 신용회복위원회나 법원의 채무 조정에 들어가기 전에 은행 차원에서 미리 채무를 조정해 주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기초수급자나 장애인 등 사회 취약계층과 실업이나 폐업, 질병 등에 따라 재무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진 차주가 빚을 갚지 못 해 3개월 이상 연체에 들어서면 원금 감면 대상이 된다.
특히 이들 중 은행 신용대출 원금이 월 소득의 35배를 넘을 정도로 많아 사실상 대출 상환이 어려워지면 대출 원금을 최대 45%까지 감면해주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금융당국은 연체에 빠지지 않은 정상 차주들이라도 이런 요건에 해당해 빚을 갚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선제적으로 이자감면 등 프리워크 아웃을 통해 채무 조정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금감원이 이렇게 나선 데는 현재 가계부채가 1500조원에 달하고 가계대출 금리 최고 상단이 5%를 넘어서는 등 취약차주들의 원리금 상환부담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출자의 원리금 상환부담이 소비 위축 등 거시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안전망을 설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일각에서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채무자가 제도를 악용해 돈을 무분별하게 빌리거나 전략적으로 빚을 갚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열심히 빚을 갚은 차주들의 역차별 논란도 나왔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고액의 대출금을 은행으로부터 받은 뒤 ‘고위적’으로 퇴사해 3개월 이상 연체하면 감면 받을 수 있는 것이냐”며 “감면 받는 금액이 3개월 일하는 금액보다 많으면 차라리 퇴사 뒤 감면받는 길을 택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어 그는 “빚진 사람들은 ‘버티면 정부가 나서 해결해 준다’는 잘못된 기대를 할 수다”면서 “결국 성실하게 빚을 갚은 채무자들이 이런 정책으로 인해 역차별을 당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밖에 은행권의 대출 문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출 감면 원금이 최대 45%이다 보니 은행 측에서 리스크 관리를 위해 대출 요건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 현재 은행권은 지난해부터 LTV·DTI 등 정부의 각종 대출규제로 대출 문턱이 높아진 상황이다.
또 다른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은행권이 1금융이다 보니 대출자 대부분 신용도가 높은 상태다”며 “위의 감면 대상을 고려했을 때 은행이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결국 중소기업 직종 대출자보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 위주로 대출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논란에 금융감독원은 이 날 즉각 해명 보도자료를 통해 “현재까지 정해진 바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감면 대상에 대한 조정만 있을 뿐 큰 틀은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도 흘러나와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채무조정제도’를 통해 과도한 빚으로 인한 정상적인 채무 상환이 어려운 분들을 대상으로 상환기간 연장, 이자율 조정, 상환 유예, 채무감면 등을 진행하는 데 은행이 먼저 나서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