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망하지 않은 대기업 오너 회장이 징역형을, 그것도 집행유예가 아닌 실형으로 선고받는 일이 거의 전무한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임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반응은 차갑다.
1심 선고에 앞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며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이윤재 회장이 대표이사직 사임 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사내이사로 취임했을 뿐 아니라 후임 대표에 딸인 이주연 부회장이 선임된 것이 드러나면서 형량을 낮추려 ‘꼼수’를 부렸다는 의혹이 확산됐다.
이에 따라 이윤재 회장에 대한 경영일선 퇴진으로 수그러드는 기미였던 ‘네티즌 피죤 불매운동’의 불씨가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면서 피죤의 앞날에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대기업 오너의 ‘1심 법정 구속’ 이례적이지만 반응은 냉담
‘대표이사직’ 사임도 “형량 줄이려는 꼼수”란 정황 불거져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임성철 판사는 지난 7일 이은욱 전 피죤 사장을 청부폭행한 혐의로 이윤재 피죤 회장에게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이 회장을 법정 구속시켰다.
임성철 판사는 “청부폭력이 용인되거나 쉽게 용서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며 “이 회장의 행위는 비난 가능성이 매우 높아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앞서 이윤재 회장은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 확인 소송을 낸 이 전 사장의 입을 막으려는 의도로 3억원을 주고 조직폭력배에게 청부폭행을 지시하고 이들의 도피를 도운 혐의로 지난 10월 불구속 기소됐다.
네티즌들 “너무 가벼운 형량”
피죤 측에 따르면 이윤재 회장의 항소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내부 논의가 진행중이지만 이전까지의 형사재판 판결 사례를 볼 때 ‘망하지 않은 회사’의 ‘현직 오너 회장’이 징역형을 선고 받고 ‘1심에서 법정 구속’까지 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만큼 사법부가 이번 사건의 심각성을 엄중하게 봤다는 의미지만 관련 보도를 통해 이윤재 회장의 ‘징역 10월 법정구속’ 소식의 실형을 선고 받은 사실이 들은 네티즌들은 ‘엄중한 처벌’이라는 반응보다 오히려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트위터 및 각종 포털 게시판에서 네티즌들은 “피죤의 이윤재는 법정에서 거짓말했는데 위증죄 아니냐. 자기는 청부폭력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위증했는데 겨우 10개월이냐”며 형량을 구형한 검찰에 대해 비판을 돌리기도 했다.
특히 청부폭력 혐의를 인정한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던 이 회장이 사내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대표이사직을 장녀인 이 부회장에게 물려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자 비판 여론은 더욱 확산됐다.
피죤 “오려는 전문경영인이 없어서…”
법원 등기소에 올라와 있는 피죤의 법인 등기에 따르면 이윤재 회장은 10월26일에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가 11월7일 사내 이사로 취임했고, 그에 앞서 10월21일 이 회장의 장녀인 이주연 부회장이 피죤 대표이사로 등재된 상태이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대표이사 사임은 형량을 줄이기 위한 꼼수”라거나, “이윤재 회장은 사내이사, 딸은 대표이사. 징역 10월로 반성이 될까 싶다”, “이 회장은 이사직으로 복귀하고 딸을 대표이사로 삼아 실질적으로 경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등의 글을 올리고 있다.
피죤 측은 8일 <매일일보>과의 전화통화에서 “전문경영인을 섭외하려고 노력했으나,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총대’를 매려하는 사람이 없었다”며 “이 부회장이 마케팅 업무를 오래한 만큼 회사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어느 누구보다 회사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렇게 결정됐다”고 해명했다.
피죤 관계자는 ‘이윤재 회장이 실질적으로 회사 경영을 좌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의혹에 대해 “외부 상황도 그렇고 건강도 좋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썬 이 회장 경영에 참여할 여력이 없다”는 말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이윤재 회장이 옥중에 있으면서도 ‘사내이사’ 직함 덕분에 월급여를 받게 된다는 점.
피죤 관계자는 ‘이윤재 회장이 사내이사로서 급여를 받느냐’ 묻는 질문에 “비공개 기업은 공개기업(상장사)과 다르다”며, “(회사 규정상) 이사직에 대해 연봉이 책정되어있는 만큼 옥중에 있어도 급여는 나온다”고 밝혔다.
추락하는 피죤…불매운동까지
1978년 국내 최초의 섬유유연제를 선보인 뒤 약 50%에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30년 넘게 1인자로 군림하던 피죤은 이미 올해 초 샤프란에게 1위 자리를 내준 바 있다.
지난 11월30일 시장조사 전문기관 닐슨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1~2월 시장점유율 LG생활건강의 샤프란은 42.5%를 기록하며 35.8% 기록한 피죤을 앞질렀으며, 이후 피죤의 시장점유율은 계속해서 하락해 최근에는 25%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1~2월까지만 해도 시장점유율 14.2%를 기록하던 3위 업체 옥시의 쉐리는 3~4월을 지나면서 19%대로 껑충 뛰어올라 불매 운동에 부닥친 피죤을 넘어설 기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8월 이윤재 회장의 엽기 행각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 밖으로 불거지고 일파만파 파문이 확산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그렇게 잘나가던 피죤이 왜 이렇게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느냐’하는 의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윤재 회장은 이번에 사법적 처분을 받게 된 ‘청부폭행’을 벌이기에 앞서 사내에서 일상적으로 직원들을 구타하거나 흉기로 위협하는가 하면 회사 공금을 자기 돈처럼 횡령했다는 의혹도 무수하게 받고 있다.
외부에서 전문경영진을 영입해도 이윤재 회장의 등쌀을 견디지 못해 몇 개월 만에 물러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엽기행각을 언론에 폭로한 것으로 의심받은 이은욱 전 피죤 사장은 청부폭력에 의한 테러까지 당했다.
이 회장의 각종 엽기 행각에 대한 보도와 청부폭행 의혹 등의 사건이 처음 불거진 때부터 네티즌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던 “피죤 제품을 구매하지 말자”는 불매운동 관련 글들은 최종 선고공판 이후부터 다시 거세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피죤 관계자는 “유통 측면에서 ‘1+1 행사’ 등 판매촉진 프로모션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며 “임원진들도 노력을 많이 쏟고 있고 신제품 개발에도 차질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지가 생명인 생활소모용품업체 피죤에게 있어 이윤재 회장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한 암울해보이는 피죤의 미래가 다시 밝아질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쉽게 떼기가 어려워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