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조직이 만든 ‘가상인물’ 낚싯밥에 ‘덜컥’…比 땅 밟았다가 ‘피랍’
<필리핀 한인남성 납치사건 전모>
“나 해킹도사, 돈 많이 벌게 해줄게” 기지 발휘해 탈출
경찰 “용의자 특정∙검거 위해 현지경찰과 공조 수사 중”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필리핀에서 한인 납치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위험(?)을 무릎 쓰고 필리핀으로 여행, 어학연수 등을 떠났던 한국인 남성들이 연이어 납치되는 사건이 최근 또 발생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지난 10일 여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피해자들을 필리핀으로 유인한 후 납치, 몸값을 요구한 현지 범죄조직에 대해 현지 경찰과 공조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 조직의 존재는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던 한 피해자가 현지에서 납치됐다가 탈출에 성공하면서 드러나게 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조직에 의해 납치됐던 첫 번째 피해자 조모씨(38∙남)는 국내 모 증권사 출신으로, 어학연수를 위해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지난 10월 17일 필리핀으로 출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필리핀 현지에 도착한 조씨는 ‘영어사용국이라도 영어를 단기간에 익히기 위해서는 개인교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에 조씨는 현지교민들과 한국인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필리핀 정보교환 사이트에 ‘영어를 가르쳐 줄 사람을 찾는다’는 구인광고를 올렸다. 이후 조씨는 이 글을 본 해당 사이트의 몇몇 이용자들에게서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는 쪽지를 받았다. 그 중 조씨의 눈에 띈 것은 한 남성이 보낸 사연.내용인 즉, “나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필리핀 남성이다. 아내의 영향 탓인지 한국에 대한 애착이 커 한국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당신을 돕기 위해 현지에서 치과의사를 하고 있는 나의 처제를 소개시켜줄테니 그녀에게 영어를 배워라”는 것이었다. 이 쪽지를 확인한 조씨는 마음이 동했다. “필리핀 사람에게 배우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이라면 의사소통은 물론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는 게 경찰에서 밝힌 조씨의 진술이다. 게다가 “‘여자 치과의사’라는 점은 미혼인 조씨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경찰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결국 조씨는 몇 통의 쪽지 가운데 이 필리핀 남성의 쪽지를 선택, 현지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지난달 24일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마닐라 띠목으로 향했던 것으로 경찰조사결과 밝혀졌다.比정보 교류 사이트에서 범행대상 물색
경찰조사결과 또 다른 피해자인 장모(42∙남)씨 역시 조씨가 필리핀 남성과 쪽지를 주고받은 사이트에 글을 올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는 해당 사이트에 ‘함께 필리핀 여행을 떠날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으나 애초에 찾으려던 여행파트너 대신 더 좋은 조건(?)의 사이트 이용자를 만나게 됐다. 운 좋게도 현지에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주겠다는 한인 여성을 만나게 된 것. 그 여성은 서울 ○○호텔 직원인 장모씨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대신 호텔상식을 알려달라”는 어렵지 않은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장씨는 흔쾌히 ‘OK’했고, 필리핀에 도착하는 날 공항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관광 갔다 돈 뜯기고 수갑 찬 채 폭행당해
납치범들에 의해 감금된 장씨는 그곳에서 지난달 24일 치과 여의사를 소개받기로 하고 하숙집을 나섰던 조모씨를 만나게 됐다. 조씨 역시 장씨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그 집에 감금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애초부터 ‘치과 여의사’ ‘숙식제공 여성’ 등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인물이었던 것.이와 관련 정씨 등 두 명의 피해자는 경찰에서 “감금돼 있던 곳에 우리 외에 또 다른 감금자는 없었다”면서 “필리핀 납치범들은 6명 이상이었다”고 진술했다. 또 “용의자들은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한국어를 구사했다”고 밝혔다. 경찰조사결과 납치범들은 원래의 목적인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이들을 감금해놓고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장씨는 지난 1일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필리핀에서 교통사고를 내 두 명을 죽이게 됐다”면서 “합의금이 필요하니 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취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깜짝 놀란 장씨의 가족들은 급하게 돈을 끌어 모아 다음날인 2일 장씨의 계좌로 5천만원의 돈을 송금했고, 송금 받은 돈은 그 즉시 납치범들에 의해 모두 갈취 당했다.하지만 먼저 피랍됐던 조씨는 폭행만 당했을 뿐 돈은 빼앗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전직 증권사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컴퓨터만 있으면 증권사 고객계좌를 해킹해 몇 백억 원도 빼돌릴 수 있다”고 납치범들의 환심을 샀던 것.이에 솔깃해진 납치범들은 장씨를 남겨둔 채 조씨만을 데리고 인터넷이 가능한 마닐라 소재의 한 호텔로 이동∙감금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에서 조씨는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지난 3일 탈출에 성공, 지인의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인 4일 오전 9시경 주필리핀 대사관을 찾아가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고를 받은 우리 경찰과 현지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납치범 일당은 카비테주 바쿠르시 모처에 감금하고 있던 장씨를 지난 5일 마닐라 소재의 모 백화점에 버려두고 달아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경찰관계자는 “납치조직들은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도록 조씨가 머물고 있던 하숙집에서 조씨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들을 모두 빼가는 등 증거를 인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면서 “현재 필리핀 경찰과 공조를 통해 납치조직 일당의 검거를 위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조씨의 기지로 두 명의 피해자는 고국으로 무사귀환 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납치사건을 계기로 필리핀 내 한국인 신변안전에 대한 문제가 또 다시 세간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현지 주재 한국대사관이 홈페이지를 통해 ‘몸값요구 납치예방 및 대처 요령’ ‘강력범죄 예방가이드’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지하고 있을 정도로 필리핀에서의 한국인을 둘러싼 범죄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연수 붐을 타고 유학, 이민 등을 목적으로 필리핀을 찾는 내국인들의 발걸음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우리정부와 필리핀 정부간의 적극적인 피해예방과 이에 따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