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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휘규] 사전적 의미로 외교(国际关系)란 ‘다른 나라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맺는 일’, ‘외부와의 교제나 교섭’을 뜻한다. 단어의 한자적 의미 그대로 쉽게 이해하자면 ‘외부와 사귀는 것’이다. 여기서 사귄다는 것은 친해져서 적이 되지 않고, 나를 도와주는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외교는 실익이 중요하다.
특히 고전적 개념이든 현대적 개념이던 상관없이 외교란 개별국가의 자기이익 실현이라는 핵심명제의 달성이 최종 목표다. 때문에 외교의 지상목표는 실익을 따지는 것. 외교에서 실리를 챙기는 것이 바로 이기는 외교다. 결국 외교의 실패는 국가가 이익의 유지, 보전 및 확보에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외교의 실패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은 역사가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3개월간 이어진 청나라와 전쟁이다.
1627년 당시 후금의 침략으로 형제의 관계를 강요당했던 ‘정묘호란’이 발발한 이후 약 10여 년 만에 다시 침략을 받은 것이다. 물론 병자호란의 발생 원인이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다. 만주 지역의 신흥강국인 청이 명과의 전면전에 앞서, 친명국가인 조선을 먼저 정벌해 후방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조선 내부의 정치 패러다임 등 복합적인 원인을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의 발발은 조선의 외교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불과 10년 전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조선은 후금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병자호란 발생 10개월 전 후금은 조만간 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국이 될 것이니 형제국인 조선도 이를 축하해 달라는 취지로 77명의 사신단을 조선에 보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선의 반응은 황당했다. 무장한 군인들로 사신들을 위협하고, 백성들은 사신들의 목을 베라며 돌을 던졌다. 이에 후금 사신단은 형제국으로 생각했던 조선에서 말 그대로 탈출을 했다.
그리고 2개월 뒤 청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의 외교관들은, 청황제를 인정할 수 없다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에 청 황제는 개선 의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국서를 보낸다.
그러나 오히려 조선의 조정에서는 국서를 받고 바로 이를 찢어 버리지 않았다고 당시 청으로 파견했던 사신들을 처벌하자는 논쟁을 벌였다. 게다가 2개월 뒤인 6월에는 청나라에 국서를 발송하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청나라 잘못으로 양국 간의 관계가 악화된 것이며, 그렇게 위압적으로 굴면 나라가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보낸다. 즉 사실상 선전포고문을 보낸 것이다.
이제 막 만주대륙을 통일하고 제국으로서 한참 기세가 등등했던 청의 황제는 조선에서 보낸 이 국서를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우리는 병자호란의 결과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고, 조선 백성 50~60만명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구한말에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당시 위정자들은 제국주의 세력의 확산이라는 국제정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왕조 국가의 신분체계 질서에 집착했다. 개항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지속했다.
그 결과 프랑스, 미국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고 결국 일본에게 무력침탈 당한 뒤,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강제로 개항을 당한다. 프랑스가 공격한 병인양요가 1866년이고 불과 5년 뒤에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이쯤 되었으면,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하게 파악할 만도 한데, 조선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더욱 한심한 것은 정보의 부족이었다.
당시 고종이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묻자, 영의정이던 김병학은 ‘미국은 작은 부락국가로 약탈을 일삼는 해적과 다를 바 없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병자호란이나 구한말 개항시기의 외교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위정자들이 실정에 어두웠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정보나 지식도 없었고 국내 정치에만 고립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믿고 국제외교는 외골수와 같이 꽉 막힌 정책을 고수했다.
분명 당시 위정자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으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본인들의 권위와 명분에만 집착했다. 사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의 신분체제 유지였다. 개항을 통한 개화, 즉 변화와 혁신은 본인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반동행위라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제대로 된 능력도 없으면서 말만 앞섰다. 실제로의 국력이나 대외역량, 관리능력은 비참하고 부끄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것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구구절절 옳은 말만 찾아 자신들의 논리만 강화해 나갔는지도 모른다. 능력도 없으면서 주전론과 척화론을 주장했다.
말과 다르게 능력이 따르지 못하니 결국 그 피해는 전부 백성들에게로 돌아갔다. 본인들은 바른길을 간다고 주장하고 외부세계와 대립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허장성세, 안타까운 정신승리의 끝판일 뿐이다. 그러니 동북아 최고 무력국가에게 선전포고 형식의 격문을 보내고,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태평양을 넘어올 정도의 해상 강국들에게 먼저 발포를 했을 것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외교의 근본적인 목적이라는 부분을 생각하면, 당시 위정자들은 외부와의 압력과 갈등을 조정할 외교역량 없이 단지 감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백성을 호도하는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 준 셈이다. 외교를 위한 명분은 만드는 것이다. 실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명분만 추구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교훈이라면 교훈이 아닐까.
최근 대한민국의 외교정책을 보면서 얼마나 실리를 챙기고 있는지, 과연 이기는 외교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주변국과 얼마나 친하고 있고, 우방국과의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외교란 ‘외부의 친구’를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