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억 지원받은 48개 기업 다른 용도로 756억 사용
김대중 대통령 기보방문 계기로 한도 증액 가능성
기보 의욕 과잉도 원인이나 사법적 심판은 지나쳐
2001년 벤처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도입한 P-CBO제도가 신용보증 확정에서부터 사후관리까지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된 것으로 드러나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감사원이 3~5월에 실시한 벤처기업 보증지원 실태 감사 결과 기술신용보증기금이 2001년 808개 P-CBO 벤처기업에를 신용 보증한 2조2천122억원 가운데 5월20일 기준으로 8천46억원(36.4%)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808개 벤처기업 중 409개사는 이미 부도가 났으며 P-CBO의 만기가 올해말까지여서 기보의 최종 손실액은 1조원을 넘어서고 3천594억원의 유동성 부족에 빠질 것으로 추정된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기보가 떠안은 자금 손실은 결국 정부가 갚을 수밖에 없어 앞으로 혈세 낭비 논란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감사원은 P-CBO 보증제도의 방만한 운영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기보 이사장이었던 이근경 전남 정무부지사를 고발조치하는 한편 재경부 장관에게 유동성 부족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P-CBO는 자금조달 능력이 부족한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기보가 신용보증을 서 발행한 증권으로 선진국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P-CBO는 2001년 당시에는 한국의 벤처기업을 살릴 제도로 각광을 받았으나 기보가 벤처기업의 신용과 기술력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아 부실덩어리로 전락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기보가 신용보증을 선 808개 벤처기업 중 투자적격 기업은 단 1개뿐이라는 점도 의혹을 사고 있다.
또 71개 기업은 신용평가 결과 보증곤란 기업, 기술평가점수 미달 기업, 이전에 지원 대상에서 탈락한 기업 등 문제 기업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기보는 이들에 대해 사업계획에 관계없이 자금을 일괄 지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P-CBO 보증을 받은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총 1천911억원을 지원받은 48개 기업이 주식투자, 부동산, 골프회원권 매입, 해외 유출 등 지원 목적과 다른 용도로 756억원을 사용했다. 이 중 31개 기업은 소유 부동산 등을 매각하고 해외로 도피하기까지 했다.
감사원은 이와 관련, △P-CBO에 대한 전문성 부족 △사업계획을 무시한 일괄 자금 지급 △실익 없는 P-CBO 해외 발행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6월20일 기보 신임 이사장에 취임한 한이헌 이사장은 업무파악을 하기도 전에 고강도 구조조정이라는 칼부터 빼들었다.
P-CBO 보증사고 등으로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보가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이사장은 21일 저녁 긴급 이사회를 열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구조조정을 실시한 후 이사장 및 각 임원이 재신임 받기로 결정하고 늦어도 8월까지는 구조조정을 마무리 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한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 7명은 일괄 사직서를 재정경제부에 제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기보는 해당기업 재무상태를 고려해 만기가 돌아온 일반보증 회수에 들어갈 예정이다. 현재 기보 일반보증 잔액은 1조4천억원으로, 전체 보증잔액의 13%에 달한다.
그러나 기금 통폐합 논란과 관련해 한 이사장은 "기보가 기술평가라는 기본 역할에 충실한다는 전제 하에, 보증규모는 아무리 늘어나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며 "기보가 규모 축소 등을 우려, 일반보증으로 눈을 돌리는 등 비행 곡선이 잘못 그어졌던 것일 뿐, 중소기업과 국가 경제를 생각한다면 통폐합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부와 열린우리당도 22일 당정협의를 갖고 '기보 재정 안정화방안 및 신용보증제도 개편 방향'을 내놓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기보의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해 금융기관의 출연금을 통해 하반기 중으로 5천100억원을 확보하기로 했다. 지난 5월말 현재 기보의 현금 보유액은 1천387억원에 불과할 정도로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당정은 따라서 현재 금융기관이 신보와 기보에 대해 출연금으로 납부하고 있는 기업대출금의 일부를 하반기 중 기보 쪽에 몰아줘 2천600억원을 확보토록 할 예정이다.
또 내년 1분기 금융기관이 기보에 납부할 출연금을 선납토록 함으로써 2천500억원의 자금이 유입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현 기보와 신보의 신용보증제도도 수혜 기업에 대한 선별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편해 실효성을 높이기로 했다.
당정협의에 따라 정부는 23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중소기업 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 보고 회의를 열어 신용보증제도와 정책자금제도를 개편해 혁신형 중소기업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정책 목표를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금융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운 혁신형 기업에 대해서는 금융 지원을 대폭 늘리는 대신 우량 기업이나 한계 기업에 대한 지원은 점차 줄여가는데 두기로 했다.
이를 위해 우선 연간 4조5천억원에 이르는 중소기업 정책자금 중 혁신형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비율을 올해 50%에서 내년부터 80%로 크게 늘리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내년부터 혁신형 중소기업에 1조3천500억원이 추가 지원되는 셈이 된다.
이와 함께 창업이나 창업 초기 단계의 중소기업은 정책적으로 지원하지만 어느 정도 완숙기에 접어든 중소기업은 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따라서 3분기부터는 중소기업이 거래소나 코스닥 시장에 상장 또는 등록할 때 부채비율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도 부채의 구성 내용과 차입비율, 이자보상배율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상장이나 등록을 허용하기로 했다.
한나라당은 재경위 소속 국회의원 명의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감사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 엄중문책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성명은 “기보의 벤처 P-CBO의 부당성은 2001년 제도 도입 때부터 이미 예견되어 온 사실”이라며 “당초 8천억원으로 검토하였던 P-CBO 발행규모가 2조원 이상으로 확대되면서 ‘눈먼 돈'을 노린 사이비 벤처기업이 속출하였고, 기보는 ‘벤처 퍼주기'의 전위대 역할을 떠맡아 지금의 부실화를 자초하였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기보는 지난해 국감 당시 2004년말 손실 추정규모가 6천255억원이라고 밝혔는데 이번 감사원 감사결과 손실규모는 8천46억원으로 30% 더 늘었고, 앞으로 1조4천억원 이상으로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어 “감사원의 2002년 감사에서는 무엇을 감사했으며, 사후대책은 무엇을 제시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뒤 “기보에 대한 업무 감독권을 갖고 있는 재경부는 지난 9년간 한번도 기보감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갚라고 반문했다.
이번 감사원 감사가 특별감사가 아닌 정기감사라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2001년 P-CBO 발행이후 업체선정 및 자금운용 과정에서 수많은 비리와 불법사례가 드러났고, 기보의 대위변제 금액이 눈덩이처럼 커져 기보가 지금의 유동성위기에 처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도 감사원이 기보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하지 않고 2002년 한차례 정기감사한 후 3년이 지난 금년에 정기감사를 실시하는 데 그친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따라서 2002년 정기감사는 형식적인 감사에 그쳤고, 금년도 정기감사는 기보가 유동성위기에 처한 데 따라 어쩔 수 없이 부실규모만을 밝히고 기보 부실화 책임을 무마하려는 봐주기 감사에 불과하다고 힐난했다.
성명은 감사원 감사결과 드러난 1조4천억원의 혈세낭비에 대한 책임 소재 문제도 제기했다.
감사원은 이근경 당시 기보 이사장을 검찰에 고발하는 선에서 그치고, 책임당국인 재경부는 신임 이사장에 기보의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2001년 재경부가 '주식관련 사채를 활용한 벤처기업 전용 유동화증권 특별보증지침'이라는 공문을 기보에 내려 보내면서 P-CBO가 등장했는데도 재경부가 적반하장 격으로 기보의 책임을 다그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정책수립 및 집행자는 뒤에 숨어 있고, 단지 하수인에 불과한 기보 임직원만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기보 부실화의 여파가 엉뚱하게 중소기업으로 불똥이 튀게 된 점도 문제 삼았다.
당정협의에서 '기술신보 재정안정화 및 신용보증제 개편방안'에 합의해 기보의 신규보증을 중단하기로 함에 따라 3만3천여 중소기업이 자금경색에 빠져 아무 잘못없는 중소기업의 연쇄부도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기보의 회생대책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정부는 기보의 유동성 공급을 위해 금년 하반기 금융기관 출연금 전액(2천600억)을 기보에 몰아주는 한편 내년도 기보 출연금(2천500억)을 금년에 당겨서 총 5천100억원을 긴급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신기술 사업자 지원을 위해 금융기관 출연을 규정하고 있는 현행 법규정을 바꾸면서까지 편법과 월권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럴 경우 불똥은 신용보증기금에까지 튀어, 신보는 올 하반기에 금융기관 출연금을 한푼도 받지 못하게 돼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에 지원되어야 할 5조원의 신규보증이 중단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보 부실화로 국민경제에 입힌 피해책임을 명백히 가리고, 정책 입안부터 집행, 관리 및 감독책임, 부도덕한 벤처기업가에 걸쳐 관련된 모든 책임자를 밝힌 뒤 사법당국의 판단에 맡겨 재발방지를 위한 일벌백계의 계기가 되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감사원이 기보의 방만한 벤처기업 P-CBO 보증제도 운영과 관련해 이근경 당시 이사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관련 임직원을 무더기로 문책하기로 것은 문제가 많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벤처기업의 자금난을 완화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가 정책적으로 밀어붙인 사안인데도 정부는 빠지고 집행기관인 기보의 당시 임직원들에게만 포괄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일관성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지난해 7월 기보 부실보다 더 큰 경제적 충격을 준 카드대란 특감을 발표하면서도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 규제개혁위 등 카드정책과 관련된 주요 기관장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
감사원은 기보가 재경부 장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2조원으로 증액했다고 지적했지만 당시 벤처기업 지원에 힘을 쏟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1년 금융기관으로는 처음 기보를 전격 방문하기 직전 1조원의 P-CBO 보증목표가 2조원으로 갑자기 늘어났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기보가 당시 P-CBO업무를 맡은 심사자와 취급자가 20명밖에 안됐다고 밝힌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인력으로 808개 기업심사를 제대로 한다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P-CBO 보증 부실이 증가한 것은 경기침체, 정보기술(IT)업종의 불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인데도 담당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억울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재 각 기관이 맡고 있는 벤처지원의 경우 5%만 살려도 성공이라고 전문가들도 말하고 있다.
이들은 따라서 벤처지원의 순기능을 무시하고 일부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해서 문책한다면 정부정책이 제대로 집행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환란의 주범으로 몰려 사법심판대에 섰던 강경식 전 재경원 장관과 김인호 경제수석도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정책 실패는 도의적 책임은 몰라도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홍세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