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想] ‘자유한국당’이라는 새 이름,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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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想] ‘자유한국당’이라는 새 이름, 어울린다
  • 김경탁 기자
  • 승인 2017.02.0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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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탁 편집부장

[매일일보] 어렸을 적 받았던 ‘반공교육’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좌익들의 특기는 기존에 있는 단어의 의미 변질”이라는 것이었다. 자주, 민주, 민족, 평화 같은 단어들을 사전에 있는 의미와 다르게 규정·사용함으로써 순진한 대중을 속이고 의식화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른바 ‘종북세력’에서 말하는 ‘우리민족끼리’라는 슬로건의 ‘민족’이 ‘한겨레’가 아닌 ‘김일성민족’이었다는 이야기에 충격 받았을 때를 빼고는 20대 이후 ‘좌익’들을 만나면서 마음 한 켠에 ‘이 사람이 말하는 이 단어가 원래 그 의미일까’ 의구심이 들지는 않았다.

사실 기존에 있는 단어의 의미를 변질·퇴색시켜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보수정치권이 훨씬 심하면 심했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그중 제일 나빴다 생각하는 집단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적 없는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제5공화국이다. ‘정의사회구현’이란 정부 슬로건과 ‘민주정의당’이란 여당 이름 그리고 제5공화국을 승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사람의 시대’가 모두 해당된다.

전두환씨가 말했던 ‘정의사회’란 정부방침에 순응하지 않으면 국가폭력이 무제한으로 가해지는 사회였고, ‘보통사람’이란 정부에서 말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며, ‘민주’와 ‘정의’를 짓밟는 행태에 부역한 ‘민주정의당’에는 ‘정당’이라 부를 만한 공통가치 조차 없었다.

새로운 당명에 ‘보수’라는 단어를 집어넣겠다고 공언했던 새누리당은 지난 8일 연찬회를 통해 ‘자유한국당’이라는 새 당명을 내정했다. 굳이 ‘보수’를 넣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헌정사상 유일한 ‘하야 대통령’ 이승만의 자유당을 연상시키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뉴라이트 친일 역사관 반영 우려를 낳았던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연상시키는 ‘바른정당’이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자유한국당’이란 이름에 거부감이 들지 않은 이유는 지금의 새누리당이 ‘자유’와 ‘한국’이라는 단어에 부합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기존의 ‘자유당’이라는 이름이 이미 이승만 정부 때문에 오염되어서 낡고 구태의연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의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지금의 국가적 불행이 모두 일부 종북좌파의 농간에 의해 벌어졌다’는 망상에 빠져서 드러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결사체인 셈이다.

굳게 믿었던 ‘사실’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졌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보다 무너진 사실을 지탱하는 마지막 지푸라기에 매달린다고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인지부조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중세유럽사회가 천문학 관측으로 증명된 지동설을 끝까지 부정했던 것으로부터, 사이비 종교나 불법 다단계 피해자들이 “나쁜 마음을 먹은 일부 중간단계 사기꾼이 문제”라는 입장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집하는 경우까지 ‘인지부조화’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 그동안 우리가 믿고 있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불편한 진실’보다 “우리가 간절히 빌었으므로 신이 감동하여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위안이 되는 거짓말’이 더 각광받는 식의 행태는 인간군상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새누리당이 국회 원내 2당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분노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위로를 나 스스로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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