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법 진단] 둑 터져버린 ‘1회용’ 일개미들의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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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법 진단] 둑 터져버린 ‘1회용’ 일개미들의 보금자리
  • 류세나 기자
  • 승인 2009.07.03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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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법 태풍 몰아친 노동계…매달 비정규직 수만 명 계약만료 앞둬

 이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정부기관·공기업 ‘비정규직 해고 러시’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비정규직법의 실질적인 효력이 발생한 첫날인 지난 1일, 전국 곳곳에서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이날 비정규직 법안 관련 기자회견장과 집회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잘못 만들어진 법 앞에 애꿎은 노동자만 희생양이 됐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2007년 7월, 비정규직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제정된 이 법은 ‘한 사업장에서 2년 동안 계약을 맺고 일한 후 계약기간이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고 있다. 그런데 ‘2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놓았던 게 논란의 불씨가 됐다. 약속된 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사용자들은 기간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인지, 계약을 해지할 것인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다. 하지만 비정규직법 효력발생 첫날 들려온 소식은 당초의 입법취지와 상반된 ‘계약해지’가 대부분이었다.

“지난 6월 1일, 2년의 최종시한 중 마지막인 1달짜리 단기 계약서를 쓸 때 담당자로부터 ‘다음 재계약은 없다’는 얘기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담당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봤지만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올해 초 남편이 실직을 해 내가 버는 180만원 남짓한 돈이 우리 가족 4명 생활비의 전부였는데…. 아이들이 아직 고등학생이라 제가 예순까지는 일을 해야 하거든요. 정치인들이 잘못 만들어 놓은 법 때문에 2년을 넘게 몸담아 온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내가 잘못해서 직장을 잃은 게 아니라 더 억울해요.”

메말랐던 눈가에 눈물이 맺히던 날…

2007년 3월부터 서울 보훈병원 영양실에서 근무해 온 선명애(44)씨는 지난 1일 ‘실업자’가 됐다. 그해 7월 비정규직법이 제정되면서 그 시기에 맞춰 재계약을 한지 꼭 만 2년하고도 하루를 넘긴 그날, 그녀가 서있는 곳은 병원 영양실이 아닌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국회 앞이었다.선씨는 “난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신문을 보고 통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선씨는 “우리 비정규직들이 사지로 내몰리느냐, 아니냐의 중대 기로에 서있던 6월 30일, 이명박 대통령은 김윤옥 여사의 수행과 의전 등을 담당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임명했다”며 “비정규직들은 어떻게 되던지 부인의 비서 뽑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을 대통령을 생각하니 정말 우리의 대통령이 맞나 싶더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곧 ‘눈물이 없다’고 말하던 그녀의 뺨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2년이 지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꿔왔다. 게다가 선씨가 일해 온 보훈병원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산하 의료기관으로, 정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오늘과 같은 사태를 맞게 될지 예상치 못했다는 것.하지만 선씨를 비롯한 동료들의 예상과 달리 이날 서울 보훈병원을 비롯한 전국의 보훈병원에서는 모두 23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계약해지 됐다. 같은 날 또 다른 공공의료기관인 한국 산재의료원에서도 28명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커지는 울분과 한숨…‘정규직 전환’은 꿈?

▲ 지난해 11월 8일 오후 서울역에서 열릴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를 앞두고 참가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당초 비정규직법 입법을 밀어 붙였던 정치인들과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계약 만료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 1일부로 정규직이 됐어야 한다. 하지만 애초의 입법취지와 달리 2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신분은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해고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민주노총은 이날 오전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1층 회의실에서 KBS계약직 노동자, 서울대병원 기간제 노동자, 산재의료원 기간제 노동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간제 비정규직 당사자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서울대병원 해직 노동자 김성미(27)씨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도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들은 항상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고된 일도 참아가며 묵묵히 일해 왔다”며 “그런데 정작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회사는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고 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김씨는 이어 “그런데 정작 정책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법 시행 유예 등을 놓고 의견다툼을 벌이는 데에다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며 “그러는 동안 비정규직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다”고 울분을 토해냈다. 1999년부터 KBS 시청자 서비스센터에서 10년째 계약직으로 근무해 온 홍미라(35)씨 역시 비정규직법으로 인해 실직자 신세가 됐다. KBS는 그녀의 청춘을 쏟아 부은 곳이다.홍씨는 “해고통보를 한 다음날 나를 대신할 아르바이트생을 앉혀 놓은 광경을 보니 말문이 막히더라”고 말하며 “2년 전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졌다고 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홍씨는 이어 “아무리 그래도 10년 동안이나 일해 왔는데…”라고 말하다 목이 메여 오는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기자회견장을 찾은 산재의료원의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나는 계약기간 2년이 되기까지 아직 4개월 가량 남아있는 상태”라며 “함께 일하던 동료를 떠나보내니 ‘나도 언젠가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 있겠구나’하는 느낌이 피부로 와 닿는다”고 말했다.

대기업, 사전 ‘외주화’ 작업으로 부담 회피

지난해 6월 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해고 통지서’를 들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노동계에 따르면 이 같은 비정규직에 대한 계약해지 움직임은 대기업보다 공기업과 공공기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는 지난달 30일 계약기간 2년을 채운 비정규직 노동자 145명과 31명에게 각각 계약만료 사실을 통보했다. 이들 공사는 앞으로 고용기한이 만료되는 비정규직 330명에 대해서도 추가 해고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도로공사도 6월말로 비정규직 20명의 계약기간이 만료됐고, 340여명의 비정규직이 비슷한 상황에 몰려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건설관리공사도 앞으로 344명을 해고할 예정이다.반면 대기업들은 1~2년 전부터 법 시행에 대비해 계약직 직원들의 업무를 외부 용역업체에 맡기는 ‘외주화’ 작업을 해왔다. 또 일부는 고용을 보장하되 임금에선 정규직과 차이를 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다.한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 관계자는 “계약이 해지된 비정규직들은 또 다시 직장을 구하기 마련이다. 이 같은 ‘회전문 효과’ 때문에 비정규직법으로 인한 정확한 피해는 통계로 잡히지 않을 것”이라며 “해고 사례는 전반적으로 인력을 줄여야한다는 압박을 받는 정부 산하 공기업이나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전했다.

‘조용한 실업대란’ 앞으로도 쭈~욱

이처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후 비정규직들의 해고 사례가 줄을 이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같은 까닭에 국민과 서민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정부와 국회에 대한 원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게 노동계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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