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26일 한일회담 문서 전면공개로 박정희 정권과 한일협정과 관련된 숨겨진 진실이 낱낱이 드러났다.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이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 전략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채 정권 유지 비용으로 쓴 점도 드러났다.
외교통상부가 26일 공개한 총 156권, 3만5천354쪽의 한일외교문서는 1951년부터 시작해 1965년6월3일에 체결된 것으로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김종필-오히라 메모’, ‘독도 폭파론’의 진원지가 일본이고 당초 일본은 청구권 관련 5천만달러만을 주고 협상을 마무리하려 했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대일청구권 협상 극대화를 위한 독도를 양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회담 내내 독도 영유권 확보를 위한 야욕을 구체화했으나 우리 정부는 반대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문서에는 개인청구권이 무시되고 국가 청구권으로 대체해 일제때 징병.징용 피해자들은 정부 배상근거와 더불어 ‘책임 추궁론’도 확보하게 됐다.
박 정권, 한일협상 대선전략 활용, 중정, ‘정권이냐,한일문제냐 양자택일해야’
이번 한일문서 공개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19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 전관수역을 ‘12마일’로 축소하며 한일어업협정을 대선전략으로 활용한 점이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추고 언론 플레이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26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제6차 한일회담이 진행 중이던 1963년 8월1일 정부의 1차 대책회의에서 외무부 정무국장은 “전관수역으로 40마일선을 명백히 하지 않고 12마일 외측에 규제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면서 12마일로 후퇴할 것을 제안했다.
같은 달 6일의 대책회의에서도 외무장관은 “한일국교정상화는 연내에 타결해야 이익이다”며 “전관수역의 국제적 인정선은 12마일로 돼 있다”고 발언했다.
특히 외무부는 ‘신방안(12마일) 제시가 국내외에 미칠 영향’이란 보고서를 통해 “대선(1963년 10월15일)을 앞두고 이런 중대문제를 처리한다는 것은 야당측 공세에 직면해 선거에서 불리해지는 만큼 신 방안의 제출 시기는 대선 이후가 좋다”고 제안했다.
결국 1963년 9월11일 열린 9차 대책회의에서 “문제는 정권이냐 한일문제냐의 양자택일이다”(중앙정보부), “정권을 먼저 잡아야 한다. 정권을 잡으면 문제는 해결된다”(최고회의)는 등의 발언이 잇따라 제기돼 한일협상이 대선전략으로 활용됐음을 증거했다.
김종필 검은 리베이트 언급없어-개인청구권 묵살, 정권유지 비용 활용
이번 외교문서에선 1962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히라 마사요시 메모와 개인청구권 묵살 내용도 확인됐다.
김-오히라 합의내용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이라는 정치적 타결이 실체였으며 자금 제공의 ‘명목’은 누락되고 없었다. 결국 청구권을 두고 한일간 줄다리기 끝에 민간차권은 3억달러로 상향조정됐다.
이와함께 김 정보부장이 한일회담 리베이트에 대한 돈의 행적은 찾을 수 없어 검은 통치자금 유입 의혹은 논란으로 남았다.
한편 개인 청구권 문제는 우리 정부가 묵살한 대목도 확인돼 이후 일제 피해자들이 정부에 대한 책임추궁 근거도 확보된 셈이다.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측이 “(개인청구권과 관련) 우리는 나라로서 청구한다”며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밝혔기때문이다.
박 정권은 지난 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에게 받은 3억 달러중 대부분을 경제개발 등에 투입했고 10%만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지급했다. 이번 외교문서 공개로 인해 개인의 청구권을 이용, 일본에게 돈을 받은 뒤 이를 정권 유지비용으로 사용한 것을 밝혔다는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실제 1975년 실시된 보상에서는 103만명으로 추산되는 강제 동원 피해자중 단 8552명만이 혜택을 받았으며, 더구나 부상자들은 일제 시대때 입은 부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예 제외됐다.
일본, 독도 폭파발언 첫 언급-청구권 협상에 ‘독도 양보론’은 거짓
그러나 이번 외교문서 공개로 독도 폭파 발언은 일본에 의해 최초로 제시됐고 대일 청구권에 독도 양보론은 거짓으로 나타났다.
일본측 대표측 일원인 이세키 유지로 외무성 아세아 국장은 1962년 9월3일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회의에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독도 폭파론이 불거졌다.
김 중정부장도 1962년 11월13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기자들에게 “농담으로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밝혀 망언의 진원지로 오해를 받았었다.
이로써 일본은 향후 독도 영유권 주장에 있어 폭이 좁아진 것과 동시에 맞대응으로 ‘독도 폭파’발언 관련 일본내 소장한 외교문서를 공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한편 청구권 협상과정에서 대일 보상 극대화 차원에서 독도 양보론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회담 내내 독도 영유권 확보를 위한 야욕을 구체화했으나 우리 정부는 회담 결렬도 불사하고 양보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