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왜적을 부숴 멸망시키고 조국을 다시 찾으면 이것이 대한민족된 신분이요, 이항복 선생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6형제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남양주에서부터 서울 흥인지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도 왕래할 수 있어 남양주의 부호라 불린 귤산 이유원의 양자로 입적해 대궐 같은 집과 드넓은 임야를 갖게 된 이석영의 막대한 재산은 물론 서울 남산 아래(명동성당 부근) 볕 좋은 땅이 이석영과 6형제의 몫이었다는 내용을 당시 작성된 토지대장, 매매기록 등 현존하는 문서들과 생생한 증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더불어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이석영과 이회영이 육당 최남선에게 500여권의 고서까지 팔았던 사실을 고려대 중앙도서관 육당 문고에 보관된 두 사람의 장서인(藏書印)이 찍힌 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현재 가치 약 2조원)을 독립 자금으로 내놓은 이석영의 재정적, 정신적 지원 아래 형제들은 삶의 터전을 세우고 신흥무관학교 를 설립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 승리를 비롯해 국군의 모태가 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들의 살을 깎아내는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한 독립지사들의 만면에 웃음 가득한 가운데 성재 이시영은 홀로 눈물을 흘렸다. 형제들이 희생으로 삶을 마감했기 떄문이다.
넷째 이회영은 궁핍한 생활 탓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전념해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고, 다른 형제들 역시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다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다.
둘째 이석영은 6형제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도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굶어 죽고 만다.
사업 담당자 임진희 주무관은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희사한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이자 남양주 대표 역사 인물인 이석영 선생을 더욱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이번 특집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일제 잔재 청산과 항일 추진사업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에 제작된 영상은 일제잔재 청산과 독립운동사 교육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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