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물가 안정을 목표로 금리 정책을 펼쳐왔던 한국은행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물가 상승세 둔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면서 다음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 동결에 나설 거란 전망이 나오지만 변수가 산적하기 때문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시스템 위기도 향후 통화정책 기조에 고려돼야 할 사안인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긴축의 끈을 놓치 않고 있는데다, 물가 안정 여부도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아있다.
29일 한국은행의 3월 소비자동향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와 기업이 예상하는 향후 1년간 물가상승률인 기대인플레이션율이 두 달 만에 다시 4% 아래로 떨어졌다. 국제유가 하락 국면 속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월 이후 서서히 둔화할 것이란 기대감이 확산된 것으로 풀이된다. 추운 겨울이 끝나 ‘난방비 폭탄’ 우려가 완화된 점도 물가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황희진 한국은행 경제통계국 통계조사팀장은 “국제유가가 하락했고,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8%로 하락하면서 앞으로 물가 오름세가 더 둔화할 것이란 인식이 확산한 것으로 보인다”며 “또 하반기로 갈수록 물가상승률이 더 내려갈 것이란 전망도 기대인플레이션 하락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3월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기저효과가 크게 작용하면서 상당폭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나아가 연말에는 물가상승률이 3%대로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대인플레이션은 자기 예언적인 특성이 있어 중앙은행과 정책당국이 예의주시하는 물가지표다. 근로자가 앞으로 물가 상승을 예상하면 기업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기업은 임금을 비롯한 비용 인상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면서 실제 물가도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앞서 발표된 물가 관련 지표는 일단 안정세다. 2월 생산자물가 상승률이 약 2년 만에 4%대로 내려오면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줄어들 가능성을 시사했고, 한은은 2월 4.8%를 기록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월에는 4.5% 이하로 내려가고 연말엔 3%대 초반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미국 SVB 파산과 스위스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 충격으로 금융시장 불안이 지속되는 점도 통화정책의 주요 변수로 꼽힌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4일 "이번 사태는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고강도 금융 긴축이 지속되면서 취약 부문의 금융불안이 불거져 나온 경우"라고 진단하며 금리 인상 종료를 우회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달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인상하면서 한미 금리차가 22년여 만에 최대 폭으로 확대됐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외환·금융시장 변동성 확대가 커지고 수입물가가 높아져 고물가 상황이 생각보다 오래갈 거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번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한미 금리차는 1.50%포인트가 됐다. 한미 금리차가 1.50%까지 차이난 것은 2000년 5~10월 이후 처음이다. 현재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는 2월 23일 동결 조치로 3.50%를 기록하고 있다.
한미 금리차 역전폭이 커지게 되면 주식 시장과 채권시장에서의 외국인 매도가 커지고, 원달러 환율이 오름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울러 수입물가 상승 영향에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연준도 이달 베이비스텝을 밟으며 금리 인상 속도조절에 나서긴 했지만, 물가 안정 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금리 정책을 펼칠 것이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도 금리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시장이 금리인하를 예상하고 있다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연내 금리인하는 연준의 기본 시나리오가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SVB 사태 등으로 초래된 은행발 신용 악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런 이유로 물가안정 목표가 변할 수 없다는 의미다. 특히 연준은 미국의 은행 시스템은 건전하고 탄력적이라고 밝히면서, SVB 파산이 전체 은행이 아닌 일부 은행의 문제로 평가했다.
공공요금 인상의 향배가 물가 상승을 다시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한은이 금리 인상 종료를 단언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부는 오는 31일 2분기 전기·가스요금 인상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연료비 상승으로 요금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향후 공공요금 인상에 따라 하락 전환한 기대 인플레이션율이 반등할 여지도 남아 있다. 실제 공공요금은 물가 기대 심리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1년간 소비자물가 상승에 영향을 미칠 주요 품목(복수선택)을 물어본 결과, 공공요금이라고 응답한 비중이 81.1%였다. 전달보다 6.6%포인트 떨어졌지만 여전히 가장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