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반도체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조 바이든(Joe Biden)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8월 9일 「반도체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 │ 침스법)」에 서명하면서 촉발된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갈수록 치열하다. 미국의 견제를 받는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목표로 자국 기업에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 반도체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한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면서 반도체 위탁생산 1위 대만과 메모리 1위 한국도 뒤질세라 국내외 투자 규모를 늘리며 본격적인 ‘칩 워(Chip War | 반도체 전쟁)’ 한복판에 뛰어든 데 이어서 최근엔 일본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유치에 성공했고, 반도체 설계 원천기술을 보유한 영국까지도 주도권 쟁탈전에 전격 참전했다.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 제품에서 사이버 보안 위험이 발견돼 “안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라는 이유로 데이터·운송·금융 등 정보 인프라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제품 구매를 중단하고 중국 내 사용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CAC)은 “마이크론 제품에서 비교적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 문제가 존재해 중국의 핵심 정보 인프라 공급망에 중대한 안보 위험을 초래한다.”라며 이같이 조치했다. 중국이 미국의 반도체 기업에 사상 처음으로 제재를 가한 조치로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갈등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2019년 미국이 같은 이유로 중국의 핵심 정보기술(IT) 업체 화웨이·ZTE에 부과한 제재를 내린 지 4년 만에 중국이 유사한 반격에 나선 것이어서 미국의 대중 제재에 대한 보복 조치로 평가된다. 중국의 이번 마이크론 제재는 지난 3월부터 마이크론에 대한 안보 심사를 진행해온 지 불과 7주 만에 나왔다. G7 정상회의 폐막에 맞추려는 정치적 타이밍도 고려했겠지만, 그동안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에 대하여 전략적으로 준비한 정밀타격식 보복 대응으로 보인다. 지난해 중국에서 회사 전체 매출의 11%에 해당하는 33억 달러(약 4조 3,500억 원)가 넘는 매출을 기록한 마이크론으로서는 이번 제재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19년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 기소를 필두로 미국이 중국에 대해 벌여온 일련의 제재에 대한 중국의 의도적이고 기획된 반격이다. 지난 4월 희토류 기술 수출을 금지한 바는 있지만 미국만을 겨냥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제품이 아닌 기술 수출 금지라는 포괄적이고 예비적인 형태를 보였다.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대(對)중국 제재에 대해 “기술적인 괴롭힘과 무역 보호주의의 전형”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해왔는데 이를 가시적인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중국은 마이크론에서 수입하던 낸드플래시는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등 자국 기업에서, D램은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조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미국 기업에 타격 주면서 자국에 필요한 공급망 차질은 최소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어 보인다. 이처럼 미·중 반도체 전쟁이 서로 제재를 주고받는 본격적인 전면전 대결 양상으로 비화하고 있어 한국 정부와 기업이 더욱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인공지능(AI)과 슈퍼컴퓨터 등에 쓰이는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와 부품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지난 1월에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반도체 장비 강국인 일본과 네덜란드도 대중국 수출 통제에 동참했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첨단 장비를 증설할 수 없으며, 오는 10월까지만 한시적 유예를 받은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 반도체 산업도 신속히 재편 수순(手順)을 밟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자체 기술력을 키워 해외 의존도를 낮추려는 중국의 행보를 미국은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對)중국 압박 수위를 가일층 높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대응 수준을 높일수록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도 그만큼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난 5월 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는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전례 없는 대(對)중국 견제 메시지를 쏟아내며 반도체를 둘러싼 지정학적 첨예한 패권 다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정상회의 후 발표한 66개 항목의 공동성명에는 각국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압박하는 구체적 ‘액션 플랜(Action Plan)’을 담았다. 미국이 “중요하게는 중국을 포함해 폭넓은 문제에 있어 전례 없는 수준의 단일한 대응을 보게 될 것”이라며, “G7 정상들은 중국 문제에 있어 역사적인 수준의 공조를 강조할 것”이라고 흡족함을 표시할 정도로 수위가 매우 높았다. 각국은 ‘디 커플링(Decoupling │ 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 | 탈 위험, 위험 요소 제거를 위한 제한적 조치)이라는 다소 완화된 표현을 썼지만, 중국에 공동 대응하겠다는 의지만큼은 확실히 못 박았다. 경제 보복과 희귀 자원 무기화 등 중국의 불공정한 경제적 강압에 맞서는 신규 플랫폼을 창설하는 한편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핵심 광물과 반도체·배터리 등 중요 물자의 안정적 공급망을 강화하는 파트너십도 구축하기로 했다. 또 중국의 군사적 현대화에 쓰일 수 있는 첨단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 규제 필요성도 언급했다.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