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기고 | 1995년 10월 14일, 토요일 저녁 5시 30분, 현대전자 연수생 27명, 통역 유학생, 그리고 러시아 운전사 총 29명이 탑승한 관광버스에 복면을 쓴 괴한이 올라탔다. 카프카스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 30대 중반의 러시아인 납치범은 미화 100만 달러와 항공기를 요구했다. 권총을 들고 있는 납치범은 협조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 두른 폭탄을 터뜨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벌어진 최초의 인질극이었다.
붉은광장에서는 당시 모스크바 시장인 유리 루쉬코프가 현장을 지휘했고, CNN을 비롯한 외신 취재진이 현장을 둘러쌌다. 러시아 협상팀은 유학생 통역을 통해 돈가방을 여러 차례 전달하여 인질들을 구해냈다. 루쉬코프 시장은 김석규 당시 주러시아 대사에게 한국어로 ‘엎드려, 엎드려’라는 발음을 문의했다. 이때 김 대사는 러시아 경찰이 무력진압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 레츠키 다리 아래서는 러시아 국가보안부(FSB)의 대테러특수부대인 알파부대와 ‘아몽’ (OMON, 러시아 내무성 특수부대) 요원들이 은밀하게 모의 진압훈련을 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루쉬코프 시장은 한국인들이 순차적으로 풀려날 때마다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김 대사에게 전했다. 목숨을 건 절박한 순간에도 한국인의 희생정신이 두드러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통역 유학생의 행동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유학생과 인질범 사이에는 공감과 친밀함이 쌓여갔다. 인질범은 유학생에게 선처를 베풀어 먼저 하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유학생은 자신이 내리면 러시아어를 못하는 한국인 연수생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거부했다. 결국 유학생은 마지막 현대직원 4명과 함께 끝까지 버스에 남았다. 새벽 2시 45분쯤 인질범이 돈가방을 받는 순간 아몽 특수부대 요원들이 도끼로 버스 유리창을 깨고 연막탄을 터뜨렸다. 특수요원들은 김 대사에게 배운 ‘엎드려, 엎드려’를 외쳤고, 한국인들은 모두 엎드렸다. 한국말을 못 알아들은 인질범은 그대로 서 있었고,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 숨졌다. 이것은 영웅의 탄생이었다. 살신성인의 도리를 다한 유학생에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 유학생은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돌연 잠적하였다. CNN을 포함한 외신들과 한국 취재진들은 결국 이 위대한 스토리를 놓치고 말았다.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