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사실까지 피해 기업이 책임져야
매일일보 = 이용 기자 | 기업 간 기술탈취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불거지는 가운데, 중소기업의 원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 제도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모방했다는 논란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스타트업 프링커 코리아의 휴대용 타투 프린터의 제품 기술과 디자인을 모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롯데헬스케어의 개인 맞춤형 영양제 디스펜서는 스타트업 알고케어의 제품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해 아직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두 스타트업에게 먼저 접근한 쪽은 대기업들이었다. LG생건과 롯데헬스케어는 각 기업에게 투자 및 협업을 먼저 문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 단계에서 피해 기업은 정부에 탄원하거나 소송에 돌입하는 방안 외에는 대책이 없는 상태다. 정부와 정치권은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중소기업의 피해 구제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탈취 기업에게 5배까지 손해를 배상하도록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공정거래위원회·특허청·중소벤처기업부 등도 전방위 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중소기업 기술유출 및 탈취 피해금액은 2827억원이며 피해 건수는 280건이다. 그러나 피해 사례에 대한 피해기업 보상과 가해기업 처벌은 전무한 실정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당사자계 특허심판 현황을 보면, 2021년 중소기업의 패소율은 75%(심결 12건 중 패소 9건)이다. 기술유출로 인한 증거 등 입증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2018년에는 50%로 반반이었지만, 2019년에는 60%, 2020년 71.5%로 갈수록 패소율이 증가하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기술 분쟁으로 해당 기술이 법정 싸움에 휘말리면 관련 파이프라인만 보유한 중소기업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특히 소송이 길어질수록 그 피해는 더 커지는데, 정부는 두 기업의 분쟁을 빨리 끝내 중소기업의 피해를 막는 ‘기술분쟁조정’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업계는 해당 제도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기술분쟁조정이란 신청하면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분쟁조정위원회가 사실관계 등을 확인해 양 기관의 분쟁 해결을 돕는 제도다. 조정에 소모되는 시간은 10개월 미만(조정 3개월, 중개 5개월)이라 통상 2~3년 걸리는 재판보다 분쟁 해결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알고케어도 롯데헬스케어를 상대로 기술 도용 의혹을 제기하며 이미 정부에 기술분쟁조정을 신청한 상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법원의 재판이 아닌 중재부의 판정으로 해결하는 ‘중재’일 뿐으로, 한쪽의 입장만 강경해도 협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실제로 중기부에 따르면 해당 제도가 시행된 2015년 이후 실제 조정이 성립된 사례는 22.6%(177건 중 40건)에 그쳤다.
일단 신청이 접수되면 전·현직 법조인, 기술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위원들이 양측의 합의를 유도하며 조정에 들어간다. 그리고 중재에 진입하면 ‘법원의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 ‘소송이 불가’해 분쟁이 종국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정작 상대 기업이 합의에 원하지 않아 조정 단계에서 실패할 경우, 결국 소송이 불가피하게 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중재 단계로 넘어가면 더 이상의 소송이 불가능한 만큼 피고 기업이 해당 제도를 기피하는 셈이다.
스타트업 A사 관계자는 “피해를 입증하는 것조차 피해자가 짊어지고 있다. 베끼는 것이 더 유리한 판에, 누가 이 나라에서 기술력을 쌓으려고 하겠나. 아이디어를 보호하겠다는 기본적인 개념도 없는 국내 제도 탓에 유망 기술들이 외국으로 떠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