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상생 금융' 압박에 은행들 주담대 금리 줄인하
애꿎은 서민만 줄곧 피해..."정부 정책 일관성이 먼저"
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5대 시중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이 이번주 들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일제히 0.1~0.2%포인트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축소 요구에 주담대 금리를 인상하던 것과 상반된 행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권을 겨냥해 “종노릇” “갑질” 등 날 선 비판을 이어가자 은행들이 금리 인하에 나선 결과로 풀이된다. 은행들은 혼란스럽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정책 기조가 오락가락 하면서 비판의 화살은 온전히 감수하고 있어서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은행은 지난 6일부터 혼합형(고정형) 주담대 금리를 연 4.21~5.61%로 책정했다. 3일까지만 해도 같은 유형의 주담대 금리가 연 4.39~5.79%이던 것을 감안하면 최저금리와 최고금리가 각각 0.18%포인트 내려갔다.
신한은행의 고정형 주담대 최저금리도 3일 연 5.02%에서 7일 연 4.89%로 0.13%포인트 인하됐다. 같은 기간 하나은행(-0.104%포인트) 우리은행(-0.13%포인트) 농협은행(-0.1%포인트)의 고정형 주담대 금리가 모두 떨어졌다. 인터넷은행인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도 고정형 주담대 금리를 각각 0.148%포인트, 0.13%포인트 낮췄다.
은행이 앞다퉈 주담대 금리를 내린 것은 정부의 상생금융 압박 영향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지난주까지 주담대 금리를 유형에 따라 0.2~0.3%포인트 인상하던 은행들이 지난 주말 상생금융 대책회의를 한 이후 금리 기조를 전면 바꿨기 때문이다.
상생금융에 따른 대출금리 하락이 최근 증가 추세인 가계부채 문제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농협 등 5대 은행의 지난달 가계대출 잔액은 689조119억원으로 전달보다 3조7000억원 가까이 늘면서 6개월 연속 증가세를 나타냈다. 가계대출 증가분의 91%를 주담대(3조3676억원)가 차지했다. 가계대출과 주담대 잔액 증가폭은 2021년 10월 이후 2년 만의 최고치였다.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가운데 은행권을 향한 상생금융 압박은 향후 ‘뇌관’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은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과 가계부채 관리는 분리해 대응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하락하면서 가계대출 증가를 부추기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은행들에 가계부채 관리를 요구하면서도 금리 인상에 따른 ‘이자 장사’를 비판하는 관치금융이 혼란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최근 윤 대통령의 발언에 이어 금융당국이 전반적으로 은행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대통령의 강경 발언이 나오자 금융당국 수장들까지 나서 연일 은행을 때리고 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최근 금리상승 과정에서 금융권 순익은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며 "이익의 원천이 소비자 편익 증대를 위한 혁신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단순히 금리상승에 따른 이자 수입 증가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시선은 따가움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올해 은행권의 이자수익이 60조원으로 역대 최대 수준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며 "3분기 영업이익을 비교해보면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을 다 합친 것보다도 은행권 영업이익이 크다"고 말했다.
한편 돈을 빌린 차주들도 우왕좌왕하는 당국의 대출 정책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허용, 전세자금대출 DSR 예외 적용 등 당국의 일관되지 못한 정책들이 가계대출 증가세를 자초해 정작 애꿎은 서민 차주들만 피해를 보고 있어서다.
실제 금융당국은 지난해 6월 가계대출 정상화 방안에 50년 만기 정책모기지 도입 내용을 포함시켰다. 아울러 부동산 시장 침체 해소를 위해 낮은 고정금리, 장기 분할 상환, DSR 미적용 등 파격적 혜택을 갖춘 특례보금자리론을 선보였다. 모두 최근 가계대출 증가세에 일조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출 규제 완화책들이다.
하지만 대출 증가세가 심상치 않자 당국은 지난달 상환능력심사를 내실화해 입증이 어려우면 DSR 산정만기를 최대 40년으로 제한키로 했다. 아울러 지난달 말 '일반형' 특례보금자리론 운영을 중단하기도 하는 등 점차 대출 조이기 쪽으로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그간 가계대출 규모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대출금리를 높여왔던 은행들이 대출금리 인상에 브레이크를 건 것도 당국의 눈치 때문이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정부와 금융당국이 지나친 시장 개입을 자제해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3.50%를 유지하고 있지만, 은행권의 대출·예금금리가 기준금리 이하로 떨어지는 금리 엇박자 현상은 벌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금융권 내부에서도 정부와 금융당국이 지나친 금융시장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은행들의 시중금리에 너무 개입하면 왜곡된 시중금리가 형성될 우려가 있다"며 "가계대출 증가를 줄여야하고, 물가를 안정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대출금리를 압박할 경우의 부작용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최근의 가계 대출 증가세를 잡기 위해선 ‘정책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다소 늦은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시장에 명확한 신호를 줘 차주들의 오판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손바닥 뒤집듯 규제 방향을 수시로 바꾸거나 예외를 둔다면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며 "'상환 능력 범위 내 대출' 원칙을 지킨다면 가계 대출 증가세는 잡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