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과거 조선시대 이전 교욱은 향교, 사부학당, 성균관 등의 관학과 서원, 서당 등의 사학에서 여성은 배제된 채 양반을 중심으로 주로 유교사상과 성리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교육을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는 보편적인 교육체계로 발전하여 학문의 다양성과 실용성을 강조하고 개인의 능력과 관심에 맞는 선택적 교육도 가능한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름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조선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盛典)에 규정된 관학 유학(儒學)생도의 정원 15,670명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조선 시대에 여성을 위한 학교가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예외없는 원칙은 없다’는 항변과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있나 보다. 조선시대에도 지방 고을에서 3년마다 여종 가운데 여의(女醫) 70명과 여기(女妓,기녀) 150명을 선발하여 중앙에 올려보내면 여의는 내의원(內醫院)·혜민서(民生署)의 의학(醫學)에서, 여기(기녀)는 관습도감(慣習都監)·장악원(掌樂院)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일반여성은 동네 서당 조차 출입을 할 수 없지만, 개인이나 집안 어른에 의해 운영된 글방 ‘가숙(家塾)’ 즉 담장안의 학교로 공간이 집안으로 철저히 제한돼 사실상 학교라고 보기엔 무리이긴 하다. 그러다 조선조 말 근대 전환기인 1886년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학교(이화여고·이화여대의 전신)를 세웠고 1887년 고종 황제가 ‘이화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이처럼 여학교 설립 운동에 앞장섰던 여성들의 탁월한 젠더 감수성 덕분에 마침내 사립이 아닌 관립 여학교 탄생이라는 결실로 맺어져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나라에서 세운 집 밖의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또한 125년 전 9월 1일에 그들이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인 “여권통문”은 여성 인권 강화, 여성의 사회참여 증가, 여성 인권 운동 확대 등을 위해 그 영항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나아가 성평등과 차별없는 사회를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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