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영화 ‘기생충(PARASITE)’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등 4번의 상을 받으며 오스카의 역사를 새로 쓴 봉준호 감독이 감독상 트로피를 안고 울먹거리다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는 말을 어릴 적 가슴에 새겼었다. 그 말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했던 말”이라고 했다. 봉 감독이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을 수 있던 건 그 문장을 메모해서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의 고 이병철·이건희 부자 회장은 메모광으로 메모를 통해 철두철미하게 경영했고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히딩크 감독, 야신 김성근 감독 등도 메모광으로 알려져 있다.
MP3 플레이어 돌풍을 일으켰던 아이리버의 ‘N10’은 미국의 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가 냅킨에 메모했던 디자인으로 대박이 난 유명한 사례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메모와 기록을 생활화했다는 점이다.
항공사 국제선 승무원으로 퍼스트 클래스 객실을 담당했던 “퍼스트 승객은 팬을 빌리지 않는다”의 베스트 셀러 저자는 이코노미 클래스에 비해 다섯 배 이상의 요금을 치르는 성공한 사람들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공간인 퍼스트 클래스에서 “펜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은 항상 메모하는 습관이 있기에 모두 자신만의 필기구를 지니고 다녔다.”는 등 성공한 이들의 남다른 공통된 습관을 발견하게 된 내용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명 작가 등 글 쓰는 직업인 사람은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 어느 날 소위 필(feel) 받으면 일필휘지(一筆揮之)한다고 환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유명 작가나 칼럼니스트, 대통령 연설문 작성자 등에게서 들은 얘기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메모와 기록은 상상 초월이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메모하는 행위는 작품을 쓰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는 메모광으로 그의 책 여백에 연필로 가득 메모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메모들은 톨스토이의 원고처럼 간주 되기도 한다.
이렇듯 작가에게 메모는 글을 쓰기 위한 재료인 동시에 또 하나의 원고이다.
메모와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에빙하우스의 ‘망각의 곡선’을 보면, 사람은 한번 보고 생각한 것을 20분 후에는 60%, 1시간 후에는 45%, 하루 후에는 30%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즉, 메모하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다는 건 진리인 셈이다.
지금은 컴퓨터나 소통매체 등을 통해 많은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고 일상 생활 속에서 비몽사몽간 메모하여 본인도 알 수 없는 내용의 메모 등 수 많은 메모지와 그림이나 이미지 메모까지 모아 작품을 만드는 원재료로 활용하고 있지만, 아나로그 시대에는 틈만 나면 메모하고 침대 머리맡은 물론 화장실에도 메모지와 펜을 두었다고 들었다. 가족들도 특히 부인은 각종 신문·잡지 스크랩, 도서관 자료 열람 등 발품을 팔아 보조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한다.
예전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쓰면 선생님이 보고 맞춤법이 틀리면 빨간 펜으로 교정과 코멘트를 해주시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매일 쓰던 일기를 방학이 되면 게으르고 놀기 바빠 개학을 앞두고 몰아 쓰다 보니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이 아닌 대충 꾸며낸 내용으로 날짜를 채우는 탈선(?) 경험을 하게 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 일기를 누군가가 보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일기 쓰기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요즈음 초등학교의 일기 쓰기는 인권 침해,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보호 등의 의견이 있어 강제하지 못하고 선생님 각자의 스타일에 의한 지도나 주제 일기를 쓰는 형태로 이루어져 올바른 맞춤법 교육이나 글쓰기 지도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어 조금만 훈계해도 아동학대 운운 등 교권과도 무관치 않다고 볼 수도 있다.
초등학생들에게 일기 쓰기를 강제한다고 해서 모든 학생이 일기를 쓰지는 않는다. 일기 쓰기의 귀찮음이 일기 쓰기의 효과성보다 크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내적 동기를 유발하고 일기 쓰기의 장점에 대해 끊임없이 알려주고 일기 쓴 친구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은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과 함께 끊임없는 성찰과 고민이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려서부터의 일기 쓰기는 아주 유익하고 가치있는 습관이기에 그 어떤 교육보다 중요하다. 이처럼 일기 쓰기가 지식과 지혜를 얻는 과정이고, 계획적이고 바른 생활을 이끌어 주는 디딤돌이라고 확신하기에 인성교육과 글쓰기 교육 측면에서 좋은 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경험과 감정을 기록하는 방법이다. 일상에서 겪는 일들을 적어두면 추억과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여 더 나은 자기 이해와 성장을 이룰 수 있고 기록된 경험은 나중에 비숫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둘째,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자극한다. 아이디어는 종종 불규칙한 시간에 떠오르기에 기억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적어두는 것이 좋다. 일기를 통해 아이디어를 적고, 나중에 돌아보며 발전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계획적이고 바른 생활을 이끌어 준다. 매일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면 시간 관리와 목표설정 능력이 향상되고 자신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면서 개선과 변화를 보일 수 있다.
흔히 메모와 기록은 종이에 쓰고 그걸 정리한 것을 말하나, 현대 사회에서의 그 영역은 음성, 그림, 사진(이미지), 영상물 등까지 폭넓게 확장되었다. 스마트폰의 노트, 메모 등의 앱을 통하거나 컴퓨터를 활용한 메모와 기록 등 다양한 방법의 메모와 기록 방법이 신세계에 있다.
2024년 갑진년(甲辰年) 한 달을 보냈지만,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목표를 슬기로운 메기(메모+기록) 생활로 정하고 어느 분야,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필요한 메모와 기록이 단순한 기억의 보조 장치가 아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술이자 나만의 플랫폼임을 인식하고 일상에서도 슬기로운 메기 생활을 실천하길 적극 추천한다.
김철홍 자유기고가(문화유산국민신탁 충청지방사무소 명예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