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한국경제인협회(FKI │ 한경협)가 지난 2월 6일 회원사의 의견을 수렴해 ‘2024년 공정거래 분야 20대 정책과제’를 공정거래위원회에 건의했다. 1980년 12월 31일 제정되어 1981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약칭 : 공정거래법)」이 안고 있는 공정거래 분야의 해묵은 규제 20가지를 개선해달라고 정부에 건의한 것이다. 한경협은 “그간 공정거래법은 경제촉진보다 대기업 규제에 치중한 면이 있다.”면서 “40년이 돼가는 대기업집단 규제를 현 경영환경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경협이 거론한 규제는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한 동일인 지정 제도, 지주회사의 금융회사 보유를 금지하는 금산 분리 원칙, 기업집단의 공익법인 의결권 제한 등이다. 수십 년 전에 만들어졌거나 한국에만 있는 규제들이 대부분이다.
동일인 지정제도는 일감 몰아주기 등을 규제하기 위해 기업집단의 총수가 누구인지를 정부가 지정하는 제도로 기업 성장에 따른 경제력 집중과 시장 경쟁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1986년 도입됐다. 총수도 직접적으로는 잘 모르는 친인척 관련 기업 정보까지 광범위하게 신고해야 해, 자칫 자료를 누락하면 총수가 그에 따른 형사처벌을 받게 돼 과도한 규제라는 비판을 받아 온데다 고도성장기였던 제도 도입 당시 경제력 집중과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도입됐지만, 이젠 국가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글로벌 경제 패권 전쟁이 가열되는 경영 환경을 고려하면 당초 취지를 상실했다. 게다가 한국에만 있는 규제다. 특히 한경협은 ‘동일인’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은 매년 계열사의 주식소유현황, 재무상황, 기업결합 등을 신고해야 한다. 문제는 단순 자료 누락이나 오기만으로도 동일인(자연인 한정)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31조4항 및 제125조에 의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에 한경협은 자연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지주사와 같은 기업집단의 핵심기업을 동일인으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금산 분리원칙도 은행의 대기업 사금고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산업자본의 금융회사 보유를 금지한 제도로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다. 이는 금융회사의 고객 자금으로 대주주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이지만 고객이 돈을 맡기지 않는 카드사와 캐피털 같은 금융회사도 일반 지주회사가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빅테크·핀테크 업체들이 전통 금융업의 영역을 파괴하며 판을 흔드는 상황에서 기업의 융합과 혁신을 가로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과 유럽연합(EU) 등 해외에선 일반 지주회사가 은행 등 금융회사까지 보유할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일본의 유통 지주회사 ‘세븐&아이(SEVEN&i)홀딩스’와 프랑스의 ‘르노(Renault)’의 경우는 지주사들이 여신금융사뿐만 아니라 은행까지 보유해 사업의 시너지를 내고 있다. 이에 한경협은 현행법상 지주회사는 고객 자금으로 대주주의 지배력을 확장할 수 없도록 금융회사 보유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고객 자금을 수신하지 않는 여신금융사(카드사, 캐피탈 등)도 보유 금지 대상에 포함해 규제 목적에 배치된다며 지주회사의 금융회사 보유를 금지한 규제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주요 국가 중 공익법인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는 경우는 없다면서 대기업 소속 공익법인의 의결권 제한 규제도 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작금의 우리 경제는 잇달아 적색경고등의 켜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2월 5일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2%로 제시했다. 지난해 11월 2.3%로 전망하며 종전보다 0.2%포인트 올리더니 이번에 0.1%포인트 내렸다. OECD 전망치는 정부와 한국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이 각각 제시한 2.2%, 2.1%, 2.3%와 비슷한 수준이다. 올해 우리 경제가 바닥을 다지고 완만하게나마 개선되고 있지만 2% 내외로 추정되는 잠재성장률을 소폭 웃도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OECD는 글로벌 경제성장률을 종전보다 0.2%포인트 오른 2.9%로 높여봤다. 지난 2월 4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작년 12월 경기 동행지수 순환변동치(추세 요인 제거)는 98.6(2020년=100)으로 집계됐다. 전월보다 0.3포인트(p) 낮은 수준이다. 하락 폭은 직전 달(-0.1p)보다도 커졌다. 향후 경기를 예측하는 데 쓰이는 선행지수는 4개월째 오르고 있다. 지금은 경기가 침체해 있지만 앞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해석되는 대목이다. 반면 현재의 현재의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동행지수가 7개월 연속 하락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렇듯 반도체 수출과 일부 제조업만 ‘나 홀로’ 호조세를 보일 뿐 민간 소비와 건설투자 등이 부진하고 취업자 수 증가 폭도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5일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12월 제조업 생산은 전월보다 0.6% 증가했다. 지난해 4분기 제조업 생산 역시 전분기보다 1.6% 늘어 3분기째 증가세를 이어갔다. 특히 기획재정부는 작년 12월 반도체(8.5%)와 자동차(4.7%) 등 주력 산업이 제조업 생산 호조를 이끈 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2월 7일 발표한 ‘2월 경제동향’에서 "반도체 경기 반등에 따른 수출 회복세로 경기 부진이 완화되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KDI가 제시한 지난해 4분기 GDP에 따르면 민간소비(1.0%), 건설투자(-1.6%), 설비투자(-3.8%) 등 내수는 부진했다. 반면 수출(9.8%)은 높은 증가세를 나타냈다. 통계청이 지난 1월 10일 발표한 ‘2023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을 보면 지난해 연간 취업자 수는 2,841만 6,000명으로 전년 대비 32만 7,000명 늘었다. 하지만 취업자 수 증가폭은 2022년(81만 6,000명)보다 50만명 가까이 줄었다. 이런 와중에도 다행히 한국은행이 지난 2월 7일 발표한 2023년 12월 국제수지 잠정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연간 경상수지 흑자는 354억 9,000만 달러로 당초 한국은행이 예측한 300억 달러를 초과 달성했다. 2022년 기록한 258억 3,000만 달러와 대비해서도 37.4% 늘었다. 한은은 작년 5월 경제전망에서 수출 부진으로 2023년 경상수지 흑자 폭이 240억달러에 그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하지만 예상보다 수출 개선세가 빨라지면서 11월 경제전망에서는 이를 300억 달러로 올렸고 이번에 이를 초과했다. 엘지(LG)화학은 지난 2월 7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미국 1위 자동차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와 24조 7,500억원 규모원 규모의 양극재 공급 계약을 따냈다. K방산도 ‘한국형 패트리엇’으로 불리는 국산 지대공 요격미사일 ‘천궁-Ⅱ’를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국방부는 지난 2월 6일 LIG넥스원과 사우디 국방부가 천궁-Ⅱ 10개 포대, 약 32억 달러(약 4조 2500억 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지난해 11월 체결했다고 밝혔다. 정부도 중동발 훈풍에 힘입어 2027년까지 K방산의 세계 시장 수출 점유율을 5%로 높이고 미래 성장 동력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모처럼의 수출 훈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와 미중 무역 분쟁 심화, 중동 정세 불안 등으로 글로벌 경제가 나빠지면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한순간에 침체에 빠질 수도 있음을 각별 유념해야 한다. 그동안 공정거래법은 경쟁촉진보다 대기업 규제에 치중하면서 우리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약화한 측면이 없지 않다. 급변하는 AI시대에 케케묵은 규제들이 기업의 신사업 진출과 투자 기회를 봉쇄하고 일반 산업과 금융업 간의 융합을 통한 시너지 창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부은 작금의 위기를 미래 성장 동력 재점화의 호기(好機)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막중함을 명찰해야 한다. 해외 기업들은 정글 같은 글로벌 시장에서 국가의 지원까지 등에 업고 뛰는데 우리만 기업의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채워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경제활력 촉진을 위해 수명을 다한 규제들을 면밀히 점검하고 과감히 수술에 나서야 한다. 경제 활력 촉진을 위해서라도 현실과 글로벌스탠더드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모처럼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재가동됐다. 차제에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위한 대타협을 통해 노사 상생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규제 혁파 등을 통한 기업 투자 활성화도 물론 필수다. 지금처럼 어렵다고 구조 개혁을 계속 미루면 저성장 고착화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다변화하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국내 기업이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발목을 잡고 있는 족쇄를 풀어 기업하기 좋고 수출하기 좋은 기반을 서둘러 마련해주어야 한다.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