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지나칠 만큼 과도한 연공서열식 임금구조와 강력한 정규직 고용 보호 제도가 되레 중장년층의 고용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국책 연구기관의 분석이 나왔다. 특히 해고가 자유로운 노동시장으로 알려진 미국과 비교해도 고용 불안정성이 두드러졌다. 중장년층의 높은 고용 불안을 해소하려면 근속연수가 쌓이기만 하면 무조건 임금을 많이 받는 과도한 연공서열형 임금구조부터 바꾸고 비정규직 보호를 대폭 강화하는 대안이 제시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3월 20일 발간한 ‘중장년층 고용 불안정성 극복을 위한 노동시장 기능 회복 방안’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55∼64세 임금 근로자 중 기간제, 파견 및 일일 근로자 등 ‘임시 고용’ 근로자 비중은 34.4%에 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8.6%의 네 배에 이르고 36개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성별로 보면 남자 33.2%, 여자 35.9%로 OECD 평균(남자 8.2%·여자 9%)의 각각 4.04배·3.98배에 달했다. 근로자의 근속 연수도 48세에 정점을 찍은 뒤 60대에 1~2년으로 급감했다.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의 경우 50~60대로 갈수록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우리나라는 과도한 연공서열제와 정규직 과보호 등으로 인해 기업들이 성과 대비 임금이 높은 중장년층을 해고하거나 새로 뽑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KDI의 설명이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가파르게 늘기 때문에 사용자인 기업 측에선 중장년층에게 조기 퇴직을 유도하고, 이들 연령층을 새로 고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본 원인은 ‘중장년층 근로자에 대한 정규직 노동 수요 부족’이 지적됐다. 중장년층 정규직 수요 부족 이유는 과도한 연공서열형 임금구조, 강한 정규직 고용 보호, 이른 정년에 있다고 짚었다. 한번 정규직에서 이탈하면 정규직 재취업이 어려워 비정규직만 늘어난다. 근속연수가 10년에서 20년으로 높아질 때 우리나라의 임금 상승률은 평균 15.1%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강한 노동 규제가 외려 중장년층을 고용 시장으로부터 퇴출로 이어져 노후 불안과 연금 고갈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경직된 노동시장과 낮은 노동생산성은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일자리를 위축시키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헤리티지재단이 최근 낸 경제자유지수 보고서에서 한국이 노동시장 자유도 87위를 기록했다. 세계 184개국을 대상으로 모두 12개 항목을 평가한 이 조사에서 한국은 전체 순위는 14위지만 ‘노동’ 부문이 가장 낮은 57.2점(100점 만점)에 그쳤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조사에서 한국 노동시장의 효율성 순위는 64개국 중 39위에 머물렀다. 세계경제포럼(WEF │ World Economic Forum) 등의 조사에서도 한국의 노동시장 경쟁력은 바닥권 수준으로 평가받으면서 전체 국가 경쟁력 순위를 떨어뜨렸다. 최근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 암참)가 실시한 조사에서도 800여 개 회원사들은 한국에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를 두고 싶지만, 과도한 노동 규제가 걸림돌이라고 지목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들이 한국에 대해 고용 형태, 근로시간, 임금구조와 관련된 노동 개혁을 주문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출산·고령화 추세가 빨라지면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문제가 생산가능인구의 감소, 즉 인구 대재앙(大災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연간 0.72명, 4분기에는 0.65명으로 급락, 인구소멸 위기를 넘어 국가의 존립 문제까지 우려되며 저출산 극복이 최대의 국가적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미 대한민국의 생산가능인구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지난달 국내 생산가능인구 비중이 1991년 이후 무려 33년 만에 처음으로 70% 선 밑으로 떨어졌다. 생산가능인구란 15~64세의 나이대에 속해 정상적인 노동 참여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감소는 나라 성장률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지난 3월 5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올해 2월 말 기준 15~64세 인구 비중은 69.9%로, 전월 70.0% 대비 0.1%포인트 내려갔다. 전년 동월 70.4%에 비해서는 0.5%포인트 낮아졌다. 모든 산업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고용노동부 등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생산가능인구는 앞으로 10년 내 300만 명가량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기업들에 가장 시급하고 어려운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저출산·고령사회의 ‘디스토피아(Dystopia)’가 현실이 될 날이 머지않다. 당장 오는 2028년부터 경제활동인구와 취업자 수가 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의 감소, 4차 산업혁명 등에 적절히 대응하려면 노동시장 유연화는 더는 미룰 수 없는 당면 과제다. 우리나라 많은 여성이 경력 단절과 재취업을 우려한 결과 아예 출산과 육아를 포기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한다. 근로자들이 더 오래,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하려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노동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우선 주52시간제 개편 등 근로 시간 유연화가 급선무다. 더불어 연공 서열에 따른 임금 상승 제한, 비정규직 안전망 강화 등을 통해 노동 시장 이중 구조 해소에도 나서야 한다. 중년 이후의 근로자에 대한 기업들의 수요가 극히 적다. 정년 보장 등 정규직에 대한 과도한 고용보호는 역설적으로 보호의 울타리 밖에 있는 구직자들에게는 높은 진입장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임금체계를 직무·성과 중심으로 바꿔 생산성만큼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지 못하면, 기업의 혁신과 활력을 끌어낼 수 없다. 더욱이 정규직 임금의 경직성, 특히 과도한 연공서열형 임금 구조가 중장년 노동시장에서의 고임금·고숙련 일자리 부족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우선 대기업·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정규직 임금의 연공성을 완화해야 한다. 현재 정규직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비정규직의 계약종료 비용을 상향해야 한다. 호봉제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은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직무성과급제로의 전환을 추진해 왔다. 일본 정부는 정년을 늘리는 대신 기업들이 퇴직 전보다 낮은 임금에 은퇴자를 ‘계속 고용’하도록 유도했다. 일본 경제가 30년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는 데 이런 개혁이 큰 도움이 됐다. 연공서열성 임금구조 등을 그대로 가진 채 정년을 연장하자는 것은 취직자와 구직자 사이의 사회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책일 뿐이다. 경제적이나 정치적 관점 모든 면에서 “정년은 연장이 아니라 폐지가 정답”이다. 노동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저성장 고착화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각별 유념해 노동시장 기능 회복을 서둘러야 한다.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