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투데이=이정미 기자] 세계 자동차업계 1~2위를 다퉈온 도요타가 30~40%에 달하는 판매 감소와 함께 사상 첫 적자를 기록하고, 미국 제조업의 상징 제너럴모터스(GM)가 파산보호신청에 들어가는 등 2009년은 세계 자동차 업계에 악몽 같은 한 해였다.
반면 한국 자동차 브랜드의 대표선수인 현대기아자동차에게 있어 지난 2009년은 미국과 중국은 물론 신흥시장에서도 판매 호조를 기록하면서 세계 5위를 넘어 4위 코앞까지 뛰어오르는 등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다른 한편에서 보면 지난 10월 20일 도요타가 신차 발표와 함께 국내시장에 공식 진출한 데 이어 11월 말 현대차가 일본 승용차 시장 철수를 선언하고 연말까지 철수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은 자동차 시장에 미묘한 진앙을 예고하고 있다. 일본 시장은 현대차가 아직까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한 마지막 ‘약속의 땅’으로, 일본 시장에 대한 공략이 성공해야 현대차의 세계정복의 대업(?)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파이낸셜투데이>는 현대차의 일본 승용차 시장 철수와 도요타의 한국시장 진출의 이면에 숨겨진 역학관계를 통해 앞으로 현대차 앞에 놓여진 길을 점검해보았다. [송년기획진단] 현대차의 보류된 화룡점정…일본 철수 “왜?”
현대차의 일본 철수를 비웃지 못하는 현지언론들 일본차가 무너진 미국시장서 판매량 오히려 성장
현대자동차가 미국과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자동차 거대시장으로 연간수요가 한국 내수시장의 약 4배인 약 600만대에 달하는 일본 승용차 시장 공략에 처음 나선 것은 2001년이었다. 진출 첫해 판매목표는 5000대였고, 도쿄와 지방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문 판매점 20곳을 비롯해 40개의 판매 거점을 확보한 뒤 4년 내에 판매 서비스 망을 120개로 확대 해 연간 3만대로 점차 확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연간 3만대 판매는 현재 독일 BMW가 일본에서 달성하고 있는 자동차 판매대수와 맞먹는 수준으로, 이를 통해 현대자동차는 세계 5대 톱 브랜드로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현대차로서는 그간 미국․유럽 등 자동차 선진국들 진출을 통해서 쌓아온 경험이 있었기에 일본 진출에 자신감을 보였고, 당시 일본 언론들도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어서 자동차 전문지들은 ‘현대차의 상륙’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예상외로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현대차 철수=한국차 철수
그러나 그로부터 9년 만인 2009년 11월, 현대자동차는 일본시장 자진철수를 결정했다. 일본에 진출한 유일한 한국 자동차 업체였기 때문에 현대차의 일본시장 철수는 곧 한국 자동차의 일본시장 철수를 의미하는 뉴스였다.
사실, 그동안 현대차가 일본시장에서의 지지부진한 성과에 골머리를 앓아왔고, 일본시장에서의 성과부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를 꺼려왔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일본 시장 철수설은 1년 전 이맘때도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판매실적을 기록했던 2008년에 비해 2009년의 사정은 조금 나아지는 기미가 있었다는 점에서 ‘전략수정’이 아닌 ‘전격 철수’를 결정한 것은 좀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왜냐하면 현대차 입장에서 일본은 ‘세계 톱3’라는 대업을 이루는 데 있어 반드시 정복하고 넘어서야할 ‘약속의 땅’이고, 일본 시장 공략을 위한 대외적인 여건은 상당히 긍정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후퇴’를 비웃지 않는 일본
이러한 점은 현대자동차가 일본시장 철수를 선언하고 난 이후 일본의 주요언론들은 현대차의 일본시장 실패에 희희낙락하기보다 일본을 제외한 모든 시장에서 거두고 있는 독보적인 성과의 비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欧美經濟>(이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17일 해외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 기업을 집중분석하는 시리즈 기사에서 “현대기아차의 1~9월 신차 판매대수가 전년동기대비 9% 늘어난 341만대로 포드를 제치고 5위로 부상했다”며, “이는 세계 지동차시장의 역사적인 역전”이라고 밝혔다.
<니혼게이자이>는 특히 지난해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서 신차 구매고객이 실직할 경우 차를 되사주는 캠페인을 발표했을 때 도요타에서 “브랜드 이미지 실추로 이어질 것”이라고 일축했지만 1년이 지난 현재 미국에서 판매 감소를 겪지 않은 자동차 브랜드는 현대와 기아 그리고 일본의 후지쯔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1년 전 현대자동차를 대놓고 비웃었다가 큰 코를 다쳤던 도요타는 지난 10월 한국시장 본격진출을 선언하면서 후노 유키토시 도요타 본사 글로벌영업본부 부사장은 “한국시장에서 차를 많이 팔아서 이익을 낼 생각이 없다”며, ‘서비스와 사회공헌’을 거론했다. 유키토시 부사장은 여기에 “한국 브랜드와 경쟁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언뜻 보기에 사상 첫 적자를 기록하면서 세계 시장 1위 자리까지 위협받고 있는 도요타의 현재 처지에서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도요타, 칼날 숨기고 들어왔다?
“한국에서 이익 남길 생각 없다”는 말의 의미는…
그러나 “이익을 낼 생각이 없다”는 말은 뒤집어서 읽으면, 도요타가 한국시장 진출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이익창출’ 외의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공격에 집중하느라 방어가 허술한 적의 본진을 쳐서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는 동시에 예상보다 잘 되면 아예 본진을 무너뜨려 접수해버리는 ‘성동격서’의 전술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대차의 일본시장 ‘일단 후퇴’ 선언은 중단기 전략적으로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측면과 함께 도요타의 한국 시장 공략에 맞선 전력의 집중이라는 면에서 ‘양수겸장’의 수로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기아차, 대우차를 거쳐 현재 자동차평론가로 활동중인 황순하 GE코리아 신사업담당 전무는 최근 기고에서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의 맏형 노릇을 하는 도요타가 진출하자 일본차들이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국내 시장 판매가격을 동급의 국산차와 비슷한 수준으로 내린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지적했다. 황순하 전무는 “도요타가 판매 주력인 캠리의 가격을 동급의 국산차와 대등한 경쟁이 될 정도로 낮춘데서 진검승부를 거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며, “도요타가 한국에 진출한 것이 판매대수 확대나 이익증대가 아니라 국산차, 특히 글로벌 시장에서 힘있게 치고 나오는 현대차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황 전무는 “도요타의 국내 본격진출은 시장경쟁에 목말라하던 국내 소비자 입장에서는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도요타의 칼끝은 우리나라 경제의 중추로 성장한 현대차 그룹을 겨누고 있다”며, “도요타의 한국 진출을 그저 반길 수만은 없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현대차, 일본시장 권토중래 언제쯤?
일본은 세계정복 마지막 관문…포기할 수 없는 시장
도요타의 본진 공략에 맞서 일본시장에서의 일단 후퇴를 선택한 현대자동차. 현대차가 일본 승용차 부문에 재진출하는 것은 과연 언제쯤이 될까?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이에 대해 <파이낸셜투데이>와의 전화통화에서 “철수를 결정한 시기에 재진출을 고려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며 “아직까지 어떠한 계획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업계의 예상은 다르다. 일본은 외국 자동차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까다롭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성공은 곧 세계시장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고, 만일 ‘현대차가 일본 시장을 휩쓸었다’는 평가가 나오면 해외 소비자들이 현대차를 바라보는 시선도 확연히 달라질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자동차의 기술력과 품질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고 브랜드의 지위도 2001년 첫 진출 당시와는 다르기 때문에 철저한 시장조사와 판매 영업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정립해 일본에 다시 진출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2010 서울오토살롱·오토서비스’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대림대 자동차공학과 김필수 교수는 한 자동차전문지 기고에서 “일본은 세계 상위권의 큰 시장이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한 소비자 특성을 고려할 때 쉬운 시장은 아니지만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라고 지적했다.
김필수 교수는 “우리가 일본 시장에서 진입에 성공해 인정을 받아야만 전 세계 시장의 공략에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며, “일본 승용차 시장을 이대로 포기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