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경기도지사 범야권 단일후보, 3개월 만의 턱밑 추격…얻은 게 더 많은 낙선
[매일일보=김경탁 기자] 아쉽게 패배했지만 가능성을 확인한 선거였다. 비록 유시민 본인은 패배의 쓴잔을 마셨을지언정 ‘폐족’의 위기에 몰렸던 ‘노무현가문’이 그가 불러일으킨 바람으로 이번 선거를 통해 부활에 성공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다.유시민 경기도지사 후보가 국민참여당에 입당한 것은 지난해 11월이었고, 국민참여당이 공식 창당한 올 1월까지만 해도 당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서울시장 출마였다. 노무현가문의 대모인 한명숙 전 총리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출마 의지를 밝힘에 따라 경기도지사 출마로 방향을 정한 것이 3월초였다. 불과 3개월 전의 일이다.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50% 대를 넘나들고 있고, 천안함 사건으로 거센 북풍이 불었다. 경쟁자인 김문수 후보는 민선자치 도입 후 첫 경기도지사 재선 도전자였다. 오래전부터 재선을 준비해온 김문수 지사의 지난 4년 도정에 대한 도내 평가도 나쁘지 않았고, 드러나 있는 약점도 거의 없었다. 선거전을 시작할 때까지 지지율 차이는 두 배 이상이었다.그리고 3개월의 여정 끝에 뚜껑을 열어서 나온 결과는 4.41%, 19만160표 차이였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과 같은 방대한 지역 말단 조직망 없이, 결코 우호적이지 못한 언론환경에서 후보 개인의 이슈장악 능력과 그 지지자들의 자발적 동원이 이뤄낸 성과다.낙선 정치인 유시민이 얻은 것과 극복해야 할 과제
북풍 변수는 논외로 하더라도 민주당 조직이 제대로 가동됐다면, 심상정 후보 사퇴 사실이 제대로 알려져 18만여표에 달하는 무효표 중 상당수가 제대로 찍혔다면, 언론환경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공평했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선거였다.특히 사람들은 이번 6․2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선거 과정의 유시민 후보를 통해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걸어온 험난한 정치역정을 연상했다.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가치가 한층 업그레이드됐다는 말이다.단일화와 희망돼지의 추억
지난 4월 ‘유시민펀드’가 대박(?)나면서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유시민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비후보후원회제도 폐지에 따라 선거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어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었지만 펀드모집 3일만에 선거비용 제한액인 40억7300만원을 채워 마감이 됐고, 자금 마련 외의 홍보효과도 톡톡히 얻었다.총 8천여명이 후원약정을 맺은 가운데 후원약정을 하고도 펀드모집 마감으로 입금하지 못한 사람만 1300여명에 달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지지율 하락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던 노무현 후보를 기사회생시켰던 소액후원금의 쇄도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5월 초 중순, 공식선거운동 시작을 코앞에 두고 유시민 후보는 민주당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경쟁에서 0.96%라는 미세한 차이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거센 바람몰이를 시작했다. 민주당 쪽이 7대 1 정도 일방적이고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이라 관측되는 방식이었다.2002년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 측의 요구를 무한 수용하면서도 끝내 단일화 승리를 거머쥐었던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의 저력을 떠올리게 했고, 노 대통령 서거 1주기와 맞물리면서 긴가민가하면서 가라앉아있었던 지지자들의 심장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노동당 안동섭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했고, 창조한국당의 지지 선언으로 야4당 연대를 쟁취한데 이어, 완주의사를 계속 밝혔던 심상정 진보신당 후보도 결국 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퇴했다. 여기에 원내 3당인 자유선진당 등 다른 보수야당들도 후보를 내지 않음으로써 1987년 양김 분열 이후 최초의 야권 단일화에 성공했다.
‘비토론’의 악몽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직후부터 ‘유시민 비토론’이 등장했다. “유시민은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안 된다”는 것이다. 원조가 ‘김대중 비토론’이라는 점에서 이 ‘유시민 비토론’을 처음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 민주당 정치인들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왜 졌을까? 2002년 대선과의 차이…
유시민 후보는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가 성사된 후 정세균 민주당 대표를 만나 “도지사 선거는 공중전에 미디어이벤트이고, 시장군수와 지방의원선거는 지상전”이라며, “공중전은 제가 확실히 해낼 것이니, 민주당은 조직력으로 함께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간의 한계
공식선거운동 기간에 벌어진 대형 이벤트들은 그나마 모자란 시간을 더욱 깎아먹었다.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20일 천안함 사건 공식발표가 있었고, 3일 뒤인 23일에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뒤이어 24일 이명박 대통령 대국민담화 등이 이어졌다.극도로 제한된 시간동안 넓은 지역을 포괄하기 위해 무리한 강행군을 벌인 유시민 후보는 성대에 무리가 왔고 결국 5월27일 있었던 선관위 주재 공식 토론이자 마지막 TV토론에서 정상적인 컨디션을 보여주지 못했다.한편 선거 이튿날인 3일 유시민 후보와 정세균 대표가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우선 정세균 대표는 “언론사들이 여론조사에서 위기감을 조성한 바람에 선택과 집중을 하다보니 충분히 지원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열심히 잘 싸워주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내 준 유시민 후보에 격려와 위로의 말 드리고 싶다. 더 큰 발전이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반면 유시민 후보는 정세균 대표와 손학규 전 대표, 박지원 원대대표 등 민주당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얻지 못해 죄송하다며, “거의 유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신의 역량부족”이라고 거듭 머리를 숙였다.자리에 배석한 박지원 원내대표는 “앞으로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하면 절대 이런 잘못된 선거는 치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며, “어려운 여건에서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선전한 유시민 후보와 한명숙 후보도 사실상 승리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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