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6일 '소그드人’ 형상 토우 등 월성 발굴 성과 공개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경주 월성(사적 제16호)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 중 서쪽 성벽의 기초층에서 제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출토됐다. ‘소그드인(人)’으로 추정되는 터번을 쓴 토우(土偶)와 함께 병오년(丙午年) 간지가 정확하게 적힌 목간이 발굴된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소그드인(Sogd人, 속특 粟特)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재의 이란계(系) 주민을 말한다.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2015년 3월부터 진행 중인 경주 월성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결과를 16일 월성 발굴현장에서 공개한다.참고로, 경주 월성 조사구역은 총면적 22만 2천㎡규모로 편의상 A, B, C, D 등 총 네 지구로 나뉘어 있다. A지구(월성 서편지구)는 2015년 6월 발굴조사가 시작된 곳이다. 이곳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서쪽에 있는 성벽이 5세기에 처음으로 축조됐고 6세기에 최종적으로 보수됐던 사실을 확인했으며, 문이 있던 자리는 이미 유실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월성 성벽은 훍으로 만든 토성(土城)이며,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성토(盛土) 기술로 축조했다. 성벽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 만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었다. 이는 흙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이며, 월성의 특징 중 하나이다.성벽 내부의 인골 2구, 제물로 사용한 제의 흔적 확인
월성 서쪽에 있는 서성벽을 조사한 결과, 축조연대는 5세기 전후로 판단되며, 국내에서 최초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제의의 흔적이 확인됐다. 인골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초층에서 두 구가 출토됐다. 한 구는 정면으로 똑바로 누워 있고, 다른 한 구는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게끔 얼굴과 한쪽 팔이 약간 돌려져 있다. 두 구 모두 얼굴 주변에 수피(樹皮, 나무껍질)가 부분적으로 확인됐다.이처럼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인골이 확인된 국내 사례는 월성이 최초이다. 주거지 혹은 성벽의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습속은 고대 중국(BC 1,600~1,000경, 상(商)나라)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제방이나 건물의 축조와 관련된 인주(人柱) 설화로만 전해져 오다가 이번에 그와 같은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다.제방,건물 축조시 사람을 함께 묻는 인주(人柱)설화 확인
인주 설화는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에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설화로 『고려사』충혜왕 4년(1343년)에 전하기를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다고 한다.현재는 발굴된 이들 인골을 대상으로 자연과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골의 성별‧연령 등을 확인하기 위한 체질인류학적 분석과 DNA 분석, 콜라겐 분석을 통한 식생활 복원, 기생충 유무 확인을 위한 골반 주변 토양 분석 등을 하고 있다. 참고로, 뼈는 당시 사람들의 체질적 특성이나 인구 구조, 질병 및 건강 상태, 식생활, 유전적 특성 등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앞으로 이 인골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오면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월성 북쪽 면에 길게 늘어서 있는 해자의 경우 2015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내부 정밀보완조사가 진행되어왔는데, 조사 결과 해자가 약 500년 동안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의 변화를 거치며 지속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해자(垓字)는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으로 성벽주위에 깊은 연못을 둘러 적의 침입을 막는 성벽축조 방식이다.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터번 쓴 토우 발견
모양은 사람과 동물, 말 탄 사람 등 다양하지만, 이중 터번을 쓴 토우가 나와 주목할 만하다.
이번 터번 토우는 눈이 깊고, 끝자락이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병오년(丙午年)적힌 목간등 다수 출토,당시 문자활동 증명 사례
월성 해자에서는 목간이 7점 출토됐다. 이들 목간을 통해 목간 제작 연대와 해자를 사용한 시기 및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 유력자를 통해 노동력을 동원‧감독했던 사실과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吏讀)사용 사실을 확인했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방법으로 신라의 특징적인 표기법이다.‘병오년(丙午年)’이라고 적힌 목간은 월성해자 출토 목간 중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것으로, 병오년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법흥왕13년(526년)이나 진평왕8년(586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월성의 사용 시기를 확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6세기 신라의 활발한 문자활동도 증명해주고 있다. 지방민에게 주어지던 관직을 의미하는 ‘일벌(一伐)’, ‘간지(干支)’이라고 적힌 목간은 노동을 의미하는 ‘공(功)’과 함께 연결돼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됐고 그들을 지방 유력자가 감독하였음을 보여준다.이는 6세기 동안 이루어진 진흥왕12년(551년)의 명활산성 축성, 진평왕13년(591년)의 남산신성 축성 등의 큰 공사에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에 행사한 통제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 다른 목간에 적힌 글자인 ‘백견(白遣)’은 이두의‘ᄉᆞᆲ고’, 즉‘사뢰고(아뢰고)’라는 의미이며, 신라 왕경 내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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