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날 ‘슬픈 미소’ 보인 까닭은
조업 중 납북됐다 귀환, 하루아침에 ‘간첩’ 둔갑
억울한 옥살이 7년…이혼 당하고 자식들도 떠나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40여 년간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았던 납북 어민 서창덕씨(62 ∙ 무직 ∙ 군산시 중동)가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고 잃어버렸던 명예를 회복했다.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정재규)는 지난달 31일 어로 작업 중 납북됐다가 귀환, 간첩혐의로 7년간 옥살이 한 서씨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21세 때부터 환갑을 갓 넘긴 지금까지 서씨를 따라다닌 ‘간첩’이라는 꼬리표가 40여 년만에 떨어지게 된 것.
재판장의 입에서 ‘무죄’라는 말이 떨어지던 순간 서씨는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은 마냥 밝지만 않았다. 억울한 누명으로 그의 청춘은 물론 직업 ∙ 건강 ∙ 가족들까지 모두 잃어야했던 지난 세월에 얽힌 아픔 때문이었을 터.
<매일일보>은 지난 5일 군산에 거주하고 있는 서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잃어버린 40년’을 되돌아봤다.
“그간의 억울했던 심정이요? 그건 말로 다 못하죠. 그 동안 몇 번의 죽을 결심을 했던지 정말 지금까지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아내는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간첩 아버지 둔 적 없다’며 떠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 져요. 그런데 무죄 판명이 났는데도 아직까지 자식들에게 연락이 없네요….”간첩 오명을 떨쳐내게 된 것에 대한 소회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밝게 웃으며 전화를 받던 서씨의 목소리가 가족들 이야기에 이내 곧 어두워졌다.‘한글 모르는 사람’이 쓴 자필 자술서(?)
1967년 5월, 오직 생존을 위해 단순하게 조기잡이를 위해 바다로 나선 서씨(당시 21세)는 조업 중 군사분계선을 넘는 바람에 북한 경비정에 피랍됐다. 그리고 피랍 124일만에 귀환한 서씨는 우리 정부에 의해 수산업법, 반공법,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의 처벌을 받았다. 서씨는 당시를 “이후 매사에 조심하며 살았다”고 회상했다. 70년대 후반 결혼을 한 뒤 자녀를 출산하게 돼 너무나 행복했던 서씨. 그러나 ‘진짜 불행’은 납북된 지 17년 만인 84년 다시 찾아왔다. 같은 해 5월 서씨는 ‘대남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귀환한 뒤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전주보안대에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서씨는 구속영장도 없이 보안대에 무려 33일 동안 감금돼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서씨는 기본적인 교육과정조차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안대 요원들은 이처럼 자신의 석자만 간신히 쓸 수 있는 서씨에게 협박과 폭행을 가한 후 임의로 작성된 자술서에 지장을 찍게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서씨는 84년 당시 법원에서 “고문과 협박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항변했으나 법원은 자술서만으로 서씨를 간첩으로 인정, 징역 10년을 선고했고 그는 7년 8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91년 5월 석방됐다.“얘 간첩이래요~” 구직도 방해한 경찰
하지만 서씨에게는 교도소 밖 세상도 ‘감시’의 연속이었다. 석방된 이후 경찰은 보안관찰 명목으로 지난해까지 16년간 그가 이동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항상 따라다녔다. 그리고 서씨는 1년에 1~2번씩 관할 경찰서로 출석, 간첩활동 여부에 대한 확인조사를 받아야했다. 게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막일도 못나갈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변변한 일자리조차 얻을 수 없었다는 게 서씨의 설명이다.고문 후유증에 대한 서씨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는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던 당시 몽둥이 찜질은 기본이고, 거꾸로 매달기, 구둣발로 손가락 짓이기기 등 온갖 고문을 당해 이후로 몸이 성한 곳이 없다”며 “특히 그 떄의 후유증으로 손가락이 펴지지도, 구부러지지도 않는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때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서씨의 참담한 고통은 보안대 고문을 거친 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당시의 억울함을 이렇게 호소했다. “몸이 말을 안 들어 일을 하기도 힘들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인근의 인력사무소 몇몇 곳을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경찰들이 따라왔고, 내가 인력사무소에서 나서면 곧바로 따라 들어가 ‘이 사람은 간첩’이라고 말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어요.”때문에 서씨는 매달 지급받은 기초생활수급자 생계지원비 50만원과 고물을 주어 번 돈으로 여태까지 생계를 이어왔다고 전했다.“남은 것 암담한 기억뿐” 억울한 40년
그의 억울한 사연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7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서씨는 수감기간 중 아내로 부터 ‘ 이혼하자 ’ 는 청천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어야했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들과의 소식마저 끊겼다. 남편이 과거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결혼한 서씨의 아내가 “간첩 남편과 살 수 없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 것. 꼬여만 가는 자신의 인생을 탓하며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살아가던 서씨는 출소 2년 뒤인 93년 지금의 부인인 임이남(64)씨를 우연히 알게 돼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고 살아가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다”는 서씨는 “처음 1년 간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유인 즉, 사실대로 말하면 임씨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같은 서씨의 걱정은 ‘기우’였다. 이와 관련 임씨는 전화기 너머로 “남편이 무고함을 믿었다”고 기자에게 힘주어 말했다.임씨는 “항상 경찰들이 남편을 따라다니는 게 이상해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물었지만 그 때마다 남편은 ‘사실을 듣고 나면 나를 떠날 것’이라고 대답을 피했다”며 “하지만 남편의 과거를 듣고 난 후, 무섭다는 생각보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힘이 돼 줄 테니 억울한 누명을 벗자’고 말했다”고 기자에게 전했다.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임씨는 ‘우리 남편이 받은 상처는 말로 다 못한다’ ‘좋은 사람이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어야 할 텐데…’ 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끈끈한 부부애를 과시했다.인터뷰 말미에 서씨는 “나라를 원망해봤자 뭐 합니까.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이제부터라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네요. 몸도 성치 않은데 앞으로라고 특별한 계획이 있겠습니까. 다만 바람이 있다면 자식들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하며 허탈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