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한복 입기' 국가무형문화재 신규종목 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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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한복 입기' 국가무형문화재 신규종목 지정 예고
  • 김종혁 기자
  • 승인 2022.03.2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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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가치를 대표해 온 한복 착용 문화의 가치 인정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24일,<한복 입기>를 신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한복 입기>는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속하여 왔으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가치를 대표해 온 전통생활관습이자 전통지식이다.
  <한복 입기>는  바지·저고리 또는 치마·저고리로 이루어진 2부식 구조,  옷고름,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 순서로 입는 착용 순서 등을 갖추고 있는 한복(韓服)을 예절·격식·형식이 필요한 의례·관습·놀이 등에 맞춰 입고 향유하는 문화를 뜻한다.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한복 입기>는 설·추석 명절뿐만 아니라 돌잔치·결혼식·상장례·제례 등 일생의례를 통해서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점차 그 빈도와 범위가 줄어들고 있으나 반드시 예(禮)를 갖추는 차원에서 갖춰 입는 그 근간(根幹)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유지·전승되고 있다.
손바느질로 한복을 만들고 있는 모습(조바위의 장식대기)사진=문화재청 제공
손바느질로 한복을 만들고 있는 모습(조바위의 장식대기)사진=문화재청 제공
근대적 산업사회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주부들이 손수 바느질을 해서 옷을 지어 입거나 수선하여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이면 새로이 원단을 장만하여 옷을 지어 입었다. 이를 각각 '설빔'·'추석빔'·'단오빔'이라 불렀다. 이처럼 계절이 바뀌는 때의 명절에는 필요한 옷을 장만해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  이처럼 <한복 입기>는 우리 민족에게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고, 예(禮)를 갖추는 중요한 매개체이기에 매우 중요한 무형적 자산이다. 한복은 고구려 고분 벽화, 신라의 토우(土偶), 중국 측 사서(史書) 등 관련 유물과 기록을 통하여 고대에도 착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 풍속도화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시대 복식(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풍속도화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시대 복식(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삼국 시대는 바지·저고리 또는 치마·저고리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 복식의 기본 구조가 완성된 시기이며, 우리 고유의 복식 문화를 기반으로 변화·발전하면서 조선 시대에 이르러 우리 복식의 전형(典型性)을 확립했다. 1900년 4월 <문관복장규칙>이 반포되어 문관예복으로 양복(洋服)을 입게 되면서부터는 수천 년간 내려오던 한복문화가 한복·양복의 혼합문화로 전환됐다.  '한복'이란 용어는 개항(1876) 이후 서양 문물로 들어온 양복과 우리 옷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누가 언제 처음 사용했는지는 특정하기 어렵다. 다만 1881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사에서 조선의(朝鮮衣), 1894년 일본 신문 기사의 한복(韓服)을 통해 한복이 당대에도 우리 민족의 생활문화·사회구조·민족정신을 담고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가 촬영한 사진 속 한복 차림(1911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미국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가 촬영한 사진 속 한복 차림(1911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태어난 아이에게 입히는 첫 옷인 '배냇저고리'는 아이의 연약한 피부에 닿기 때문에 부드럽고 자극이 적어야 해서 가능한 한 솔기를 적게 하여 지었고, 오늘날 돌복으로 많이 입는 '까치두루마기'는 까치설날이라고도 불리는 섣달그믐에 아이들에게 입혔으며, 때로는 설빔으로 입히기도 하였다. 두루마기에 붙이는 색동소매는 벽사(避邪)와 길상(吉样)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판화 속 한복 차림(1919년)(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판화 속 한복 차림(1919년)(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혼례식에서는 녹의홍상(綠衣紅裳)이라고 하여 신부는 연두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쓰고 겉옷으로 활옷이나 원삼을 착용했다. 상장례에서 망자(亡者)에게 입히는 수의(壽衣)는 살아생전 윤달에 미리 준비하면 장수(長壽)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바느질 매듭을 짓지 않았다. 이는 망자나 자식들이 화통(化通)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혼례복 중 원삼(圓衫)(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혼례복 중 원삼(圓衫)(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19세기 말 서양식 의복 도입으로 인해 우리 고유의 의생활에도 변화가 생겨 일상복은 간편함과 실용적인 서양식 의복으로 대체되고, 한복의 형태는 크게 간소화되면서 의례복으로 일부 축소됐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의례별로 예(禮)를 갖추는 차원에서 갖춰 입는 그 근간이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한복 입기>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내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  고구려 고분 벽화, 신라의 토우(土偶), 중국 측 사서(史書) 등 관련 유물과 기록이 확인되는 점,  역사·미학·디자인·패션·기술·경영(마케팅)·산업·교육 등 전방위적으로 학술연구가 왕성하고 앞으로도 학술연구 자료로서의 가능성이 큰 점,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현재에도 의례별로(명절·일생의례) 예(禮)를 갖추는 차원에서 갖춰 입는 그 근간이 지속·유지되고 있는 점,  현재에도 생산 주체, 연구기관, 가족 공동체 등 다양한 전승 공동체를 통하여 한복을 착용하는 등 ‘한복 입기’ 관련 전통지식이 전승·유지되고 있는 점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다만, <한복 입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이미 지정된 <김치 담그기>, <장 담그기>등과 같이 특정 보유자와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았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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