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만나다' 추존 덕종, 소혜왕후 경릉(敬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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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을 만나다' 추존 덕종, 소혜왕후 경릉(敬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2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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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 왕세자 신분으로 세상 떠나 아들 자산군 왕위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
[매일일보] 경릉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경릉 덕종 능침, 이하사진=문화재청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시호를 받았고,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됐다.

능의 구성

경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의 형태다.원칙적으로는 정자각 앞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왕, 오른쪽 언덕(동쪽)이 왕비의 능이지만, 경릉은 오른쪽 언덕(동쪽)에 덕종을 모셨고 왼쪽 언덕(서쪽)에 소혜왕후를 모셨다.
경릉 수복방
이는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분에 맞게 능을 조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덕종의 능침은 장례를 간소히 치루라는 세조의 명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해 봉분을 크게 만들었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만 배치하고 나머지 석물은 생략했다.소혜왕후의 능침은 일반 왕릉의 형태로 조성해 봉분은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다.

능의 역사

경릉 정자각
1457년(세조 3년)에 덕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양현 치소 동쪽에 묘를 조성했다.원래 이 자리는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鄭易)의 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의묘(懿墓)가 조성되면서 정역의 묘역은 이장됐다.그 후 1504년(연산군 10년)에 소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경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다.

덕종(德宗) 이야기

추존 덕종(1438 ~ 1457)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첫째 아들로 1438년(세종 20년)에 경복궁 금중에서 태어났다.1445년(세종 27년)에 종실로서 도원군(桃源君)으로 봉해졌고, 1455년(세조 1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됐다.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병세가 악화돼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재를 올리고 병의 치유를 빌었는데, 이 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해 세자의 완쾌를 빌었다고 한다.
경릉 덕종 문석인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돼 1457년(세조 3년)에 경복궁 정실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덕종의 아버지인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폐위하여 유배를 보냈다.

따라서 늘 이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세조의 업보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단명했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나돌았다고 한다.
덕종의 죽음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유배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이 후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전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덕종은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죽었다 생각하고 분노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세조는 일찍 죽은 아들에게 의경세자라는 시호와 의묘(懿墓)라는 묘호를 내리고, 현재의 자리에 장례를 치뤘다.이후 1469년에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처음 성종은 예종의 양자입적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의경세자는 바로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고, 황백고(皇伯考, 백부)라 칭하고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하되 종묘에는 부묘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이듬해인  1470년(성종 1년)에 의경왕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경릉(敬陵)이라 했다. 그 후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 1475년(성종 6년)에 덕종으로 추존되고 종묘에 신주를 부묘하였다.
경릉 소혜왕후 능침

소혜왕후(昭惠王后) 이야기

소혜왕후 한씨(1437~ 1405)는 본관이 청주인 서원부원군 한확과 남양부부인 홍씨의 딸로 1437년(세종 19년)에 태어났다.처음 도원군부인으로 봉해졌다가 1455년(세조 1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다.그러나 1457년(세조 3년)에 덕종이 승하하자 정빈(貞嬪)의 칭호를 받고 출궁하여 사저(현재의 덕수궁)에서 생활했으며, 1465년(세조 11년)에 칭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1469년에 둘째 아들 자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의경세자가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로 책봉됐다. 이 때 인혜왕대비(안순왕후)와의 위차문제가 논의돼 형제 서열에 따라 인수왕비가 인혜왕대비보다 높은 위치로 정해졌다. 그 후 1475년(성종 6년)에 인수왕대비로 높여졌다.
경릉 소혜왕후 문무석인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불심이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고,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명심보감'등의 유교서적을 재편집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그러나 지나친 정치간섭으로 며느리 폐비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대왕대비가 됐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충격으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릉도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 됐다.<자료,사진출처=문화재청,국립고궁박물관,공공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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