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송병형 기자] 청와대가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안을 내놓으며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제를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총리선출제를 요구하는 야당에 대해서는 “변형된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반대하고 있다. 실제 한국에서는 유럽 등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의원내각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의원내각제를 처음 전면 도입한 제2공화국이 정치적 혼란과 군부의 발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고, 이후에도 국무총리가 권위주의 정권의 시녀 노릇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한국은 달랐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에도 초반을 제외하고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으며, 해방공간의 제헌국회에서도 의원내각제 요구가 대세였다. 당시 세계적 대세도 의원내각제이기는 마찬가지. 최초의 변형된 의원내각제라는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도 1958년에야 등장했다.
하지만 미국통이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식 대통령제를 관철시켰다. 다만 정치적 타협에 의해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총리를 대통령이 임명하는 식의 의원내각제 요소가 헌법에 끼어들었다. 물론 이승만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6‧25전쟁 직전 총선으로 국회를 민족세력이 장악하자 재선이 위태로워진 이승만은 전쟁 상황을 악용했다. 그는 1952년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발췌개헌)에 이어 1954년 대통령 3선 제한 철폐 개헌(사사오입개헌)을 하면서 국무총리제 등 대부분의 의원내각제 요소를 없앴다. 발췌개헌안에서 잠시 양원제와 내각불신임제 도입 등 의원내각제가 강화되기는 했지만 애초 기만용으로 빛도 못 본 채 사라지고 말았다. 개헌 자체가 피난처인 부산에서 한밤중에 국회의원들을 협박해 이뤄진 것이었다. 이승만은 국민의 정치의식이 현저히 낮았던 당시 상황을 이용, 두 차례의 개헌으로 장기독재의 길을 열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등장한 제2공화국은 명실상부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과는 달리 운이 나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세력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헌정을 유린했다. 박정희‧전두환이 만들어낸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제5공화국은 대통령제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기형적이었다. 국무총리제 등 일부 의원내각제 잔재가 남아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되레 총리의 존재는 대통령을 제왕적 존재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탄생한 제6공화국은 ‘군인왕’ 시대의 기형적 제도를 손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통령은 제왕적 권위를 누렸고, 총리는 대통령의 정치적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았다.
30년이 지나 87년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개헌작업이 시작됐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 헌정사를 왜곡해 온 ‘사이비 의원내각제’의 잔재를 지우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된 대통령제를 하겠다면 ‘총알받이 총리’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 반면 굳이 한국식 대통령제의 전통을 이어가야겠다면 총리제를 정상화할 수 있는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