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김경탁·변주리 기자] 선거는 끝났지만 ‘책임’은 남았다. 87년 민주화 이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혼탁했던 4·27재보선 결과가 한나라당의 참패로 끝난 가운데 선거전반을 혼탁하게 만든 원흉으로 이재오 특임장관이 지목되고 있다.
지난 4월19일 국회 운영위, 민주당 이윤석 의원은 이재오 장관을 향해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꾸짖었다. 이 장관이 13일 한나라당 내 자신의 계파인 ‘함께 내일로’ 소속 의원들과 북한산에서 모임을 가진 데 이어 20일 한 식당에서 회동을 가질 것이라는 보도에 대한 우려였다.
“직원 파견한 적 없다…수첩 대량 배포됐다”던 특임장관실
직원 파견 사실 드러나자“선거에 관여한 바 없다”말바꾸기
공성경 “이재오, 1960년 3·15부정선거 주범 최인규 내무장관 방불”
“이명박 대통령이 그에게 부여한 ‘특임’이 노골적 선거개입이냐?”
4월20일 ‘함께 내일로’ 모임에서 이재오 장관은 “4·27 재보선의 승리를 위해 작전을 짜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분담을 통해 현지에 갈 사람은 가고, 사람을 찾을 사람은 찾아 총력을 다하자”며 의원들의 선거 지원활동을 촉구했다.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이재오 장관은 “재보선 상황인 만큼 친한 의원들이 모여서 조금 더 힘을 합치자는 독려 차원의 모임일 뿐”이라며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 없다”고 강변했고 “자기가 소속해있는 정당 사람들에게 선거 열심히 하라고 얘기하는 게 무슨 논란거리가 되겠느냐”고 반박했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2004년, 기자회견에서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이겼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소추를 당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렸고, 민주당은 22일 이재오 장관을 선관위와 검찰에 고발했다.
공직선거법 제9조 공무원의 중립의무 위반, 60조 선거운동 할 수 없는 자의 선거운동 위반, 255조 부정선거 운동 및 국가공무원법 65조 정치운동의 금지 등 4가지 조항 위반 등의 혐의였다. 그리고 민주당이 이재오 장관을 고발한 22일 바로 그날, 특임장관실 소속 공무원이 김해 현지에 내려가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의혹이 터져나왔다.
특임장관실의 수상한 수첩
경남 김해을 이봉수 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천호선 대변인은 “21일 이봉수 후보 선대위에 특임장관실 직원들이 사용하는 수첩이 입수되었다”며 “이재오 장관의 지휘 아래 직원까지 파견해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매우 확실한 증거”라고 폭로했다.
천 대변인은 김해시 장유면에 있는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 선거사무소 근처에서 습득했다는 파란색 수첩을 공개했다. 수첩에는 ‘특임장관실’ 로고가 새겨져 있으며 김해을 지역 유권자들을 만나 나눈 선거 판세 분석, 유권자들의 성향, 선거전략에 대한 조언과 대응방안, 언론 보도에 대한 동향 등을 분석한 내용이 12페이지 분량으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수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OO, 정OO 이라는 두 사람의 실명으로, 이들의 이름은 이재오 특임장관실 시민사회팀 소속 공무원의 이름과 일치했다.
수첩 첫 페이지에는 유권자 민심을 파악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 지침으로 보이는 ‘Tip’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는 ①후보평가를 듣는다(장·단점), ②택시를 여러 대 탄다, ③중간보고, ④자동차 대리점 / 꽃가게 / 문방구 / 학생들, ⑤특이한 소문(특이 사항), (김해) 아줌마 스킨십 → 니도 부닥친나?, ⑥지역 찌라시, ⑦정확한 바닥민심 파악 등 마치 여느 선거캠프의 정보수집 활동에 대한 지침이 담겨 있다.
또한 ‘식당 4번’, ‘미장원 1번’, ‘택시 6번’, ‘담배가게 2번’, ‘문방구 2번’ 등 수첩 주인의 동선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으며, ‘롯데마트 앞→여관/W, 짬’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김해에서 숙실을 하며 정보수집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OOO 비빔국수 40대 여 도지사 지역발전, 60대 여 지역발전’, ‘OOO 미장원 30대 미장원 남 양비론’, ‘택시A 남 50대 지역발전’, ‘OO 슈퍼 남 50대 기권 바빠서’ 등 직업, 성, 연령과 함께 성향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천 대변인은 “김태호 후보의 ‘나홀로 선거’가 얼마나 허구이고 기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재오 장관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스스로 물러나야 하며 김태호 후보 역시 김해 시민을 기만한데 대해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8·8개각 당시 총리 후보로 내정됐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한 전력이 있는 김태호 후보는 이번 김해을 재보선에서 ‘나홀로 선거 유세’ 활동을 벌이며, 지역민들의 동정심을 얻겠다는 전략을 내세웠고, 이 전략이 주효해 결국 선거에서 승리했다.
말 바꾸는 특임장관실
의혹이 제기된 직후, 특임장관실은 해명자료를 통해 “직원을 파견한 적이 없다”며 “특임장관실 수첩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임장관실 직원의 선거개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정치공세에 불과하다”고 강변했다.
특임장관실 수첩은 기념품으로 9000부 가량이 제작돼, 그동안 내방객 및 행사 참석자, 새해 선물 등으로 6500부 가량 배포되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23일 천호선 대변인은 “수첩 주인의 행적을 아는 분들이나 그와 직접 인터뷰한 시민들의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며 “수첩 주인은 수첩을 잃어버린 사실을 뒤늦게 알고, 22일 이를 찾기 위해 전날 자신이 방문했던 곳을 찾아다니며 ‘직장 마크가 찍혀 있는 중요한 수첩을 찾고 있다’고 접촉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어 24일 이봉수 후보 선거대책위원회는 ‘특임장관실 수첩’의 주인이 특임장관실 소속 신용갑 시민사회팀장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수첩의 주인인 신 팀장과 수첩에 적힌 이OO, 정OO, 그리고 이재오 특임장관을 김해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했다.
선대위는 “확인 결과, 수첩의 주인은 22일 오전 11시경 CCTV가 설치된 장유면 소재 편의점을 방문한 바 있고, 그 외에도 수첩을 찾기 위해 전일 방문한 사람들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전화번호 ‘OOO-OOO-OOOO’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같은 날 특임장관실은 “선거에 관여한 바 없다”는 짧은 글의 성의 없는 해명자료를 내놓았다. 천 대변인은 “처음 의혹을 제기한 22일, 특임장관실은 ‘특정 지역에 직원을 파견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는데 이제는 ‘선거에 관여한 바 없다’로 말을 바꿨다”고 꼬집었다.
천 대변인은 “문제의 수첩 주인이 특임장관실 소속 팀장으로 밝혀지고, 그가 김해 지역을 활보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더 이상 ‘파견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계속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일 것”이며 “또 ‘파견’이 객관적 사실로 확인될 경우에 대비하려는 파렴치한 속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아마 저들은 앞으로 ‘그저 동향을 조사했을 뿐 선거에 관여한 바는 없다’는 식으로 구차하게 변명할지도 모른다”며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국민을 장기판의 졸로 보는 일”이라고 성토했다.
실제 한나라당 안형환 대변인은 25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특임장관실 직원이라면 왜 거기에 갔는지 저도 궁금하다”면서 “일부에서는 갔다면 여론 수집을 하러 가지 않았겠냐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이 일이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도 궁금하다”고 사건의 무게를 낮추려는 의도를 보였다.
선관위는 한나라 부속기관?
천호선 대변인은 “특임장관실은 ‘선관위가 사실 여부를 밝혀 줄 것’이라며 스스로 고백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며 “선거가 끝날 때까지 버티겠다는 심산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사실 여부를 객관적으로 밝혀 줄지는 회의적이다. 20일 이 장관이 ‘함께 내일로’ 의원들과의 모임에서 “선거 작전을 짜자”며 구체적인 선거운동 지침을 하달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 공보담당관실 신우용 서기관은 22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적으로는 정치 활동이 가능하지만, 장관으로서의 공적 지위로는 선거의 중립 의무를 지게 되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 서기관은 특히 “공적 지위가 아닌 사적인 지위에서 이루어진 행위는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이 장관이 ‘함께 내일로’ 소속 의원들을 만난 것은 공적 지위로서 만난 것이 아니라 정당의 당원으로서 사적인 지위로 만난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민주당 이낙연 사무총장은 “이재오 장관이 공무원을 동원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지만, 선거법은 (선거독려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춘석 대변인도 “노 대통령 탄핵 당시 헌재는 선거에서의 중립의무가 부과되는 공무원은 ‘좁은 의미의 직업공무원은 물론이고,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는 정치적 공무원을 포함한다’고 했다”며 “선관위는 당시 결정문을 다시 읽어보라”고 성토했다.
‘특임’이 뭐관데?
창조한국당 공성경 대표는 “제기되는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재오 장관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진두지휘했던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인규 장관을 방불케 하는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공성경 대표는 2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를 임명하면서 맡긴 ‘특임’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을 하면서까지 지금 같이 노골적 선거 개입을 하라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공 대표는 “이 장관은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한반도 대운하를 저지하기위해서 은평乙에 출마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게 참패함으로써 이미 국민적 심판을 받았지만 법과 상식을 우롱한 ‘문국현 죽이기 재판’에 힘입어 ‘7?28 은평乙 재보선’을 통해 재기했다”며,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늘 분란과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투표일이었던 4월27일 아침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재보선은 역대 재보선 중에서 가장 혼탁했다”며, “이 정권이 이번 선거를 금권과 관권을 총동원해서 불법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을 추구했던 타락선거였다”고 지적했다.
박 최고위원은 “특히 중앙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구가 아니라 한나라당의 부속기관으로 전락해 국민으로부터의 지탄을 받고 있다”며, “선거가 끝나더라도 철저한 진상조사를 해서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처리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