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변호인 측은 기나긴 재판 기간동안 검찰이 특정하지 못하고 두루뭉실하게 표현했던 뇌물공여 일시를 정확한 날짜와 날씨, 스케줄을 대조해 특정함으로써 한명숙 전 총리의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한 총리는 그날, 거기에 없었다”
변호인단, 달력·날씨·스케쥴 비교해 ‘범행장소 부재’ 증명
검찰은 “이 사건 제보자는 한신건영 전 사장 한만호 자신이며, 피고인으로부터 사업상 도움을 받기 위해 3억씩 3차례 총 9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며, “돈을 전달할 때마다 어음할인까지 하면서 급히 자금을 조성한 것을 보면 정치자금용이 분명하다. 합법자금으로만 정치하는 정치인은 극히 적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회사가 어려워져 2억을 돌려받은 후 서로 ‘고맙다’는 등 통화한 사실까지 있는데 3억을 더 돌려 달라 했으나 돌려주지 않으니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폭로를 결심한 것”이라며, “그 후 피고인에 대한 기소가 임박했을 때, 검찰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고, 출소 후 피고인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한만호 주변인물들이 피고인 주변인물들을 접촉해 법정진술번복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사건을 요약했다.검찰은 한만호의 검찰진술서와 실황조사서, 한신건영의 ‘채권회수목록’과 그 근거가 된 ‘B장부’, 자금추적결과 및 환전내역, (돈 전달 때 쓰인) 여행용 가방 구입영수증, 경리부장 정 아무개가 작성해 검찰에 보낸 이메일, 한만호 핸드폰 통화 내역, 한만호의 구치소 접견 시 녹음 CD 분석 등의 증거가 범죄 사실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자금 사용처를 ‘비장의 무기’로 제시했다. 한 총리가 현금 4억8천만 원, 미화 32만7500 달러, 1억짜리 수표를 받았는데, 수표와 반환한 2억 원을 빼고 나머지 2억8천만 원이 계좌추적 결과 나온 한 총리와 남편, 여동생의 저금액, 사무실 보증금 등의 총액과 같다는 것이다. 달러에 대해서는 아들 유학자금으로 7만 달러가 들어갔고 동생이 1만2700여 달러를 사용했는데 나머지는 한 총리의 해외여행 시 환전기록이 없기 때문에 한 총리가 쓴 것으로 보인다는 게 검찰의 추정이다. 이에 대해 변호인 측은 “검찰의 추정에 따르면, 한 총리가 국회의원이나 총리를 지내면서 받았을 월급과 남편의 수입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졌고, 한 총리는 정치자금을 받아 놓고도 다 저축했으며, 정작 대선후보 경선 기탁금 등 정치자금은 집을 담보로 은행빚을 얻어 쓴 셈이 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변호인 측은 또한 “검찰로부터 언니의 정치자금관리인으로 지목된 동생은, 자신의 수입은 한 푼도 없이 오직 9천여만 원의 어마어마한 대통령 후보경선 정치자금을 통장에 집어넣고 관리한 것”이라고 검찰 주장의 비합리성을 지적했다.
[최후변론] 변호인단 “처음부터 짜 맞추기”
백승헌 변호사가 대표로 진행한 한명숙 총리에 대한 최후변론에서 변호인단은 수사가 시작된 시점(1차 사건 무죄선고 직전)이나 초기 수사속도로 볼 때 이 사건에 정치적 표적수사의 의혹이 있음을 우선 지적했다. 또한 한만호의 초기 부인조서가 없고, 그로부터 마지막 조서를 받은 후에도 검찰은 그를 계속 소환해 총 73회에 걸쳐 조서를 외우게 하고 사건을 ‘굳히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한만호 사장의 진술번복에 대한 검찰과 변호인단의 확연한 입장 차이가 두드러졌다.
검찰은 한 사장의 ‘검찰 진술’이 진실이며 설사 진술이 엇갈려도 재판부가 유죄를 인정한 판례를 제시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한만호 사장이 검찰에서 허위 진술할 복합적 동기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의 법정 양심선언은 고사하고라도 검찰에서 한 진술까지 일관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었으며 객관적 타당성을 결여했음을 지적했다.
그동안 재판과정에서 검찰 주장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로 지적된 것은 한만호 사장이 한명숙 총리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구체적 날짜와 시간을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협조적인 증인들에게는 수년 전의 사소한 일까지 시간대별로 모조리 기억해 내라고 닦달한 검찰이 정작 한 사장에게서는 3억이나 되는 거액을 전달한 날짜를 3차례 모두 기록도 없고, 기억도 없는 상태로 공소장을 꾸민 것이다. 변호인 측은 만일 어느 날짜를 정해 놓았다가 그날 한 총리의 알리바이가 성립되면 낭패를 볼까 봐 검찰이 일부러 4월 초, 5월 초, 9월 초로 느슨하게 잡아 놓았다는 추측을 해왔다.
더욱이 그 해 9월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와 일산에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 비가 왔기 때문에 남는(전달이 가능한) 날은 8월의 사흘과 9월10일 밖에 없는데, 8월29일 오후 한 총리는 국회 대학생정치체험단 행사에 참가했고, 30일 오후 5시에는 YTN 생방송 대담에 출연했으며, 31일에는 민주신당 제주도당 개편대회 등으로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고, 9월10일 민주신당 청주 합동연설회에 참석했다.
한명숙 “결과적으로 검찰의 의도는 성공했다. 저는 선거에서 0.6% 차이로 졌기 때문이다. 만약 제게 채워진 검찰의 족쇄가 없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최후변론에 이어 한명숙 전 총리의 최후진술이 이어졌다. 최후진술에서 한 전 총리는 “이 사건의 본질은 정치적 의도에서 권력과 정치검찰이 합작하여 기획한 보복 표적 수사”라고 강조했다. “깨끗한 정치인으로 알려진 한명숙에게 부패와 비리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한명숙이 몸담았던 민주정부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훼손하고 상처와 모욕을 주어 국민과 유리시킴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싶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한 전 총리는 또한 자신의 서울시장 출마를 막거나 낙선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면서 “결과적으로 검찰의 이런 의도는 성공했다. 저는 선거에서 0.6% 차이로 졌기 때문이다. 만약 제게 채워진 검찰의 족쇄가 없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전 총리는 “검찰 수사의 성격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이번 재판과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이 재판에서 논의되고 검증되고 있는 어떠한 사실과도 저는 무관하다. 검찰 공소 내용의 단 한 줄도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후진술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제가 왜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제가 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며, “검찰이 채택한 증인들도, 그들이 말하는 증언 내용에 대해서도 저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한 전 총리는 “법정에 나오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며, “제 재판인데도 저는 일찌감치 무대에서 밀려났다. 한만호씨의 위증여부를 놓고 상습사기범과 마약범까지 등장하여 지리한 공방을 하는 동안, 저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 알지도 못하고 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말을 듣기 위해 그 숱한 날을 그냥 멍하니 앉아있기만 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저의 결백을 온몸으로 증언해 보이고 싶었다”며, “사법 정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었다면, 저를 믿고 항상 응원을 보내는 국민이 없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신문을 거부한 이유에 대해 한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죽음으로 내몬 이 정권이 저를 그 다음 표적으로 삼아 정치생명을 끊어 유폐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바로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라며, “따라서 애초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상황을 놓고 논쟁과 다툼을 벌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설명했다.
한명숙 “나름 인지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