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폰지사건, 다단계 금융사기 대한민국 금융시장의 데자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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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이승익 기자] 찰스 폰지(1882~1949)는 이탈리아인으로 1903년 미국으로 건너온 뒤 허황된 꿈을 좇으며 도박과 낭비를 일삼다가 전과자가 됐다. 거리의 탕아로 살았지만 머리 만큼은 비상했던 폰지는 1919년 국제우편 요금을 지불하는 대체수단인 국제우편 쿠폰이 당시 제1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변동폭이 심했던 환율을 적용하지 않고 전쟁 전의 환율로 교환되는 점을 눈여겨 봤다. 이점을 착안한 폰지는 해외에서 이를 대량으로 매입한 뒤 미국에서 유통시켜 차익을 얻는 사업을 구상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후 공격적인 투자를 받기 위해 폰지는 45일 뒤 원금의 50%, 세달 뒤 원금의 100%에 이르는 수익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고 투자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약정된 수익금이 지급되자 재투자를 하며 자신의 지인을 2차 투자자로 소개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소문이 미국 전역에 퍼져 더욱 더 많은 투자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투자 총액이 몇 달 만에 막대한 규모로 불어났다. 폰지는 덕분에 몇 개월 만에 무일푼에서 갑부가 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유명 인사가 됐다.
그러나 이 사업의 실상은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의 수익을 지급하는 금융피라미드였다. 여기에 보스턴우체국에서 폰지가 운영하는 방식의 국제우편 사업을 허용한 전례가 없으며, 국제우편쿠폰을 환전하는 데는 폰지가 투자자들에게 약정한 기일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는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불안해진 일부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폰지의 사업은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몰락, 1920년 폰지는 결국 파산신고를 하고 사기혐의로 구속되었으나 미리 로비를 해뒀던 정관계 인사들의 막대한 힘을 빌려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폰지는 1925년 플로리다주에 부동산 거품이 일 때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같은 방식의 사기 행각을 벌이다가 다시 체포돼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부터 '폰지사기'는 이른바 금융피라미드의 원조로 언급되며, 오늘날 다단계 금융사기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게 됐다.
지난 2008년 미국 나스닥증권거래소 회장을 지낸 버나드 매도프가 금융사기로 FBI에 체포되어 다시 한번 ‘폰지사기’가 인구에 다시 회자됐다. 매도프는 1960년 자신의 이름을 딴 증권사 버나드매도프LLC를 설립한 뒤 20년 가까이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최대 65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사기 행각을 벌였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종류의 ‘폰지사기’ 역사는 결코 미국에 뒤지지 않았다. 지난 박정희 정부 시절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대 부도수표 사태로 이름을 날린 장영자가 그러했고, 2000년대 초반 무자본 M&A로 악명을 날린 코스닥 기업범죄의 시초 정현준,진승현 게이트가 그러했다. 또 다단계 모집으로 수 많은 개인투자자들을 자살로 몰고간 조희팔,주수도 등 희대의 악명 높은 다단계 사기꾼 회장들도 그들의 뒤를 이어갔다.
웃지 못할 사연이지만 10년전, 당시 경제부 기자였던 필자의 장모도 가족과 주변 지인자금을 모두 끌어들여 이같은 금융피라미드 사기의 수억대 희생냥이 됐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는가. 그때 참혹했던 가족의 피해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가족간의 다툼은 물론 처가 식구들 대부분은 우울증을 앓았다.DB,신한,우리,KB 대형금융사,펀드 판매 수수료 매출만 급급하다 화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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